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근 Oct 13. 2021

유토피아 몽상록

제 목 : 유토피아

원 제 : Utopia

지은이 : 토마스 모어

옮긴이 : 류경희

출판사 : 펭귄클래식코리아

출간일 : 2008년 10월 31일

사 양 : 252쪽 / 132ⅹ203mm



지하철 안은 독서하기에 꽤나 괜찮은 곳이다. 지하철이 선로를 따라 달릴 때 느껴지는 얕은 떨림, 왠지 모르게 일정한 간격으로 느껴지는 덜컹거림,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단 한 번 스쳐갈 뿐인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방해만 될 것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도 책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제 막 『유토피아』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다.


오, 유토피아여! 정녕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지금 타고 있는 이 지하철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무표정의 얼굴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손잡이를 꽉 붙잡고 서 있는 할머니, 책을 보는 척하며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 나……. 『유토피아』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유토피아와는 아주 먼 곳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내가 해 봤자 세상은 딱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도망치듯 눈을 감는다. ……



모어

다 왔습니다. 자, 어서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벤치가 라파엘 씨로부터 유토피아에 대해 들었던 바로 그 벤치군요. 그때의 전율을 저 또한 직접 느낄 수 있다니, 이보다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어

아닙니다. 후세의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 저는 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세의 사람들에게 이상향과 유토피아는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이념과 종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는 천차만별이죠.


모어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때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찾아와 존경을 표하고는 돌아갑니다. 또 어느 때는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저를 찾아와 찬사를 보내고는 돌아갑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유토피아가 사유 재산이 없는 이상적 사회로 보였을 테고, 금욕주의자에게는 유토피아가 인간의 악한 욕망을 엄격히 통제하는 이상적 사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유토피아 공화국 내 모든 제도에 동의하지 않죠.

 

모어

바로 그 점을 후세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라파엘 씨가 묘사한 유토피아 공화국은 물론 이상적입니다. 그 국가가 채택하고 있던 사회 제도의 많은 부분은 제가 살고 있었던 ─ 저는 지금 지상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 현실 세계의 수만 가지 해악들을 제거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유토피아』를 쓴 이유도 그것들이 정말로 현실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도 밝혔듯이 저는 유토피아의 모든 제도에 수긍하고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적인 이상은 있어도 절대적인 이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각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상적인 사회의 기준은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또 이상적인 제도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으며 어느 정도로 구현해 낼 수 있는지도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저는 제가 몸담고 있던 영국의, 나아가 유럽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청사진으로서의 하나의 유형을 제시하고 싶었고, 라파엘 씨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유토피아 공화국의 사회상이 그 유형에 상당히 적합했습니다. 다만 유토피아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현실을 개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현실 세계에 유토피아를 끼워 맞춰야 하지요. 현실과 이상을 면밀하게 비교 분석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유토피아를 향한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책은 좀 읽을 만했습니까?

 

예, 선생님. 이제 제 차례가 온 듯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유토피아 공화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게 주십시오.


모어

제가 가장 기다리고 있었던 순간입니다.


유토피아 공화국의 경제 제도가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그곳은 사유 재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동등한 물량을 소유하는 것과 물건의 개인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죠. 또 다른 누군가는 모든 구성원들이 재산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이를 받아들입니다. 이 주장은 일반적으론 문제가 없을지라도, 유토피아 공화국의 경제 체제를 정확히 설명해 주진 못합니다.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산이란 일정한 수준의 가치만큼 획득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대상이죠. 그러니 재산이 성립하려면 특정 대상이 교환가치를 지녀야 하며, 그러려면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인 시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토피아 공화국에서는 교환 행위 자체가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그에 상응하는 가치의 맞바꿈 없이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재산이 공평하거나 공유될 필요가 없이, 재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교환의 매개 수단인 화폐도, 교환가치의 상호 척도를 조율해 주는 시장 영역도 그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죠.


모어 

정말 귀중한 말씀입니다. 시장 경제의 부재가 일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저를 찾아오게 했겠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저는 책 어디에도 유토피아 공화국이 저의 완전한 이상향이라고 밝힌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에 대해 기술된 내용은 전적으로 라파엘 씨의 말을 최대한 빠뜨리지 않고 옮겨 적은 겁니다. 그들은 라파엘 씨를 찾아갔어야 했어요. 오히려 저는 돈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 체제가 매우 어리석어 보인다고 책의 말미에 적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제도적 기반들, 지금의 논지로 좁히면 현실의 사유 재산 제도를 완전히 폐기해 버린 뒤 유토피아 공화국의 경제 제도를 곧바로 실현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현실의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해야만 하지요.

 

선생님께서 몸담고 계셨던 15세기 말의 영국에서는, 후세의 사람들이 명명하길, 제1차 인클로저 운동이 횡행하기 시작했죠. 대부분이 귀족 출신인 지주 계급은 값비싼 양모를 생산하기 위해 농경에 사용되던 땅을 목장으로 바꾸고는 울타리를 둘러쳤습니다. 토지를 경작하여 나온 곡식의 대부분을 지주들에게 바친 뒤 그나마 남은 일부분으로 생명을 부지하던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가차 없이 울타리 밖으로 내쳐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돈이 없어 굶어 죽거나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 이상의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은 사유 재산 제도의 심대한 오작동을 드러내는 징후였습니다. 그 넓은 땅들은 그것을 정성스레 가꾸어 이로운 결실을 생산해 내는 농민들의 것이 아니라, 흙 한 번 만져 보지 않은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한 재산일 뿐이었습니다. 귀족, 지주와 같은 유한계급은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대부분의 사회적 부를 독점했습니다. 반면 농민, 장인, 상인 등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인 생산자와 공급자는 유한계급의 핍박 아래 제대로 된 경제적 보상을 받기는커녕 생존하는 것조차 위태로웠습니다.

 

모어

‘양이 사람을 먹어 치우는’ 광경은 정말로 지독하게 절망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 재산 제도의 폐해가 만연하고 있던 현실로 말미암아, 영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은 사유 재산 제도에 기반한 경제 체제를 다각도로 검토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유 재산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과연 어떤 경제 제체를 갖추고 있을지 상상하고 구상해야 했어요. 상반되는 상황을 설정하여 분석하는 작업은 각각의 대상이 지닌 속성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토피아 공화국의 이야기를 출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유 재산 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사회의 한 유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제가 몸담고 있던 시대의 부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깊고도 간절한 마음에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선생님, 유토피아 공화국에 대한 더 구체적인 논의는 제가 이어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모어

그처럼 즐거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제가 청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존의 현실적 관점에서 보면 유토피아 공화국의 경제 체제에서는 사회적 최적 수준을 훨씬 밑돌게 물자가 생산되리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자를 시장에 내다 팔아 이익을 획득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양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력을 투입하려는 유인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죠. 유토피아 공화국은 (학자, 성직자 등의 특정 직업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들이 생산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생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식량을 생산하는 체계가 두드러집니다. 모든 구성원들은 의무적으로 최소 2년 이상 농사일에 복무해야 하며, 다른 직종에 종사하다가도 정기적으로 농사일에 복귀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그들은 재산을 모으고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동기가 없더라도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유토피아 공화국은 굶어 죽는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사유 재산 제도가 없이도 공동체의 결속을 안정적으로 유지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현실 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농사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유 재산 제도에 기반한 경제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생산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도록 사회 구조를 조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도 불가능하죠. 구성원들 사이에 생산성 차이가 분명히 발생할 거고, 이는 곧 재산과 그에 따른 부를 획득하는 정도의 차이를 야기할 겁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부를 더 많이 획득한 사람들은 생산 활동을 지속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속할 경제적 유인이 없기 때문에 생산 활동을 포기할 겁니다. 그러니 유토피아 공화국이 주는 교훈은, 구성원들이 공동체 내에서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물자가 안정적으로 생산되고 공급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하고 적절한 방안은 현존하는 사유 재산 제도의 순기능을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일 ─ 필수 물자를 생산·공급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 활동에 걸맞은 재산과 부를 얻을 수 있도록 경제 구조를 고치는 일입니다. 그들이 합당한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생산성이 증가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공동체 내 물자가 풍족해져 구성원들에게 더 나은 보상이 분배되는 선순환이 이뤄질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럽 사회에는 유한계급의 탐욕적 행태가 아주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로 부가 쏠리는 현상을 강력히 제어하는 것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죠.

 

모어

『유토피아』를 통해 제가 말하고 싶었던 논지를 명확히 짚어 주시니 이것만큼 기쁜 일은 천국에서도 찾지 못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간절히 원했던 현실 개혁을 생전에 구현해 내지 못했습니다. 귀족과 지주들의 울타리는 제가 지상을 떠난 뒤 1세기가 지나고도 땅 깊숙이 박혀 있더군요. 그러나 저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유토피아』를 통해 진실로 전하고 싶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의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 가는 일은 한 인간의 생애를 바친다 하더라도 불충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조차 그만둔다면,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헤쳐 온 역사를 보십시오. 역사를 이끌어 온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꿈꾸는 사람들 ─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꿈과 삶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제 기도의 전부입니다.



…… 이후로도 대화가 더 오갔던 것 같은데, 이 이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옆 사람이 어깨를 치는 바람에 짧은 꿈에서는 깼지만, 나는 이제 길고도 새로운 꿈을 꾼다. 이곳은 분명 유토피아와는 아주 먼 곳일지 모른다. 유토피아를 향한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박혀 있는 울타리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찾아서 힘껏 뽑아내고자 한다. 혹여나 힘이 부족하여 잠시 주저앉더라도, 반드시 뽑아낼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부여잡으려 한다. 그리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유 재산인 나의 마음, 그 속에 박힌 울타리들도 지금부터 하나씩 뽑아내고자 한다. 나는 책을 집어넣은 뒤, 여전히 힘겹게 서 있는 할머니를 향해 일어선다.

이전 20화 경제학의 주도(酒道)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