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누구보다 먼저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점심이 되기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러 왔다. 점심을 먹고 두 시간 정도 지나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추가로 들어왔다. 일이 대부분 마무리될 즈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포도밭으로 일하러 왔다. 열심히 일을 끝내고, 이제 하루 일당을 받을 시간이다. A는 흥건한 땀을 닦으며 제일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런데 주인이 가장 나중에 온 사람부터 일당을 주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가장 먼저 온 사람인 자신과 똑같은 보수를 지급한다니...? 우리가 A의 처지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제 몇 가지 조건을 바꿔 보자. 점심 전에 온 사람들은 평소에 왕래가 잦은 외가 친척이다. 그다음 온 사람들은 마음이 적적할 때마다 술자리를 같이 해 주는 친구들이고,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몇 번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때마다 밝게 인사해 주던 이웃 가족이다. 포도밭 주인 또한 평소에 당신을 잘 대해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심이 후한 사람이다. 다시 우리가 A의 처지라면, 처음 상상했던 것과 동일하게 행동할까? 결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먼저 왔지만,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보수가 주어지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전자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제20장의 한 내용으로, 존 러스킨이 그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책의 주제를 꿰뚫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 마음이 아주 불편하고 심지어 화를 낼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마음이 더러 편안해지고 일했던 시간이 보람차게 느껴질 것이다. 둘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존 러스킨이 말하길 그것은 바로 ‘애정’이다. 우리의 경제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애정인 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인간이 향유해야 할 진정한 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배운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재산을 모은다. 그러나 책이 지적하기를, 결코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부는 반드시 이웃의 결핍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온 사람이 보수를 더 받는다는 것은, 나중 온 사람이 딱 그만큼의 보수를 덜 받게 됨을 의미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이웃이 우리가 획득한 재력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제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웃도 간절히 원하는 부를 소유했을 때만이 부유해질 수 있으며, 부자 되는 기술은 “여러분의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해두는 기술”(87쪽)인 것이다.
존 러스킨은 이러한 통념적 부의 개념에 반대한다. 그가 생각한 진정한 부의 개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부와 ‘도덕’의 불가분적 관계를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먼저, 어떤 물건이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첫째, 유용해야 하고 둘째, 선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물건이 유용하다는 의미에는 궁극적으로 그 물건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포도가 비탈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한들, 아무도 포도가 식품인 줄 모른다면 포도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리고 포도가 식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그 누구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또한 마찬가지다.
포도밭 이야기로 돌아가서 논의를 확장해 보자. 그 주인이 포도밭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폭탄 제조 공장을 운영 ─ 인심 후한 주인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 한다고 하면 어떨까? 폭탄은 그 자체로는 충분히 유용한 물건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폭탄을 어디에 사용하기 위해 생산하느냐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폭탄을 진정으로 유용한 목적을 위해 ─ 그야말로 도덕적으로 사용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핵심이다. 그가 이웃 나라를 침입한 국가에게 폭탄을 납품하여 부를 축적한다면, 우리는 그를 부유한 사람이 아닌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부의 축적은 단순한 물질의 축적뿐만 아니라 도덕적 활용 능력의 축적도 필요로 한다.
포도밭 주인에게서 보수를 받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살펴보자. 존 러스킨은 “소비의 방식과 그 결과야말로 생산의 진정한 시금석”(196쪽)이라며 윤리적인 소비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한다. 만약 포도밭에서 일한 그들이 다음 날 침략 전쟁에 나가기 위해 개인 무기와 폭탄을 구입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포도밭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고 얼마만큼 돈을 벌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규탄하고 무기와 폭탄을 뺏어 땅에 파묻어 버릴 것이다. 진정한 부는 생산·획득·소비의 어느 측면에서도 윤리적 사고가 배제되지 않은 그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우리가 관념적 차원을 넘어 현실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부를 선호하기를 갈원 한다.
마지막으로 포도밭 이야기의 끝을 상상해 보자. 사람들은 먼저 오든 나중에 오든 보수가 동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다음 날, 모든 사람들이 점심까지 늦잠을 실컷 자고 오후 늦게나 포도밭으로 오려고 할까? 모두 부자가 되도록 부추기는, 그리하여 이기적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 사회라면 그 누구도 일찍 일하러 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사회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고, 각자의 욕심만을 달성하기 위한 부도덕한 행동이 팽배할 것이며, 끝내 비정한 정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묻는다. 인간은 정말로 그러한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충분히 알고 있다 ─ 인간이란 본디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존 러스킨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인간은 ‘애정을 동력으로 삼는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남보다 덜 일하고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포도밭에서 애정이 송이송이 열릴 때, 우리는 그것을 따먹음으로써 살아간다. 우리는 이웃이 가지지 못한 재력을 갖춤으로써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다. 존 러스킨은 이렇게 전한다.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기능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여 그 인격과 재산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197쪽) 내 이웃이 정성껏 준비한 포도를 감사히 받을 줄 알고 훗날 더 기쁜 마음으로 애정을 나눠 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