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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근 Oct 11. 2021

귀갓길

제 목 : 공터에서

지은이 : 김훈

출판사 : 해냄

출간일 : 2017년 2월 1일

사 양 : 356쪽 / 128ⅹ188mm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아무 질서도 없이 눌렸다.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는 몹시 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꼬이는 발음으로 내 이름을 몇 번 부르고는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긴 신발장의 문을 짚고서도 아버지는 당신의 구두를 쉬이 벗겨 내질 못했다. 그러다 넘어지세요. 앉아서 벗으세요. 아빠 별로 안 취했어, 괜찮아.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서 아버지는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러다 넘어지면 다쳐요, 아버지. 침대에 앉아서 벗으세요. 괜찮아, 아빠 별로 안 취했다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버지는 바지를 처음 벗어 보는 사람처럼 흔들거렸다.


양말은 끝내 벗지 못한 채 아버지는 화장실로 겨우 들어갔다. 아버지는 자꾸만, 자꾸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취기는 더 강해졌고 그만큼 아버지는 약해져만 갔다. 나는 화장실 문 앞에 엉거주춤히 앉아, 변기 위에서 끙끙거리는 아버지의 취한 숨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다. 화장실의 작은 문턱도 나오기 어려울 만큼 아버지는 더욱 비틀거렸다. 나는 아버지를 뒤에서 강하게 안았다. 아, 이렇게 살결을 맞대어 아버지를 안아 본 적이 언제였을까. 그렇게 안은 자세로 침대를 향해 함께 걸었다. 아빠 괜찮다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얼른 편히 누우셔야죠. 침대 앞에 다 왔을 때,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구토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토와 함께 아버지는 참아 왔던 말 또한 쏟아 내기 시작했다. 미안해.


(…) 미안하다는 말은, 조일 힘이 풀어진 아래를 아들에게 맡기는 그 속수무책의 무력함이 괴롭다는 말인지, 이제 끝나가는 한 생애 전체가 허접해서 송구스럽다는 말인지 마차세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은 자신의 밑에 와닿는 아들의 시선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괜찮다. 나는 괜찮어. 마동수가 벽 쪽으로 돌아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 (29쪽)


아버지는 서 있으면 서 있는 상태로,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상태로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나는 침대 곳곳에 뿌려진 아버지의 구토와 미안함을 휴지로 모으고 걸레로 닦았다. 괜찮아요 아버지. 저는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끝끝내 소화시키지 못한 것들의 흔적은 금세 침대 시트 속으로 스며들어, 아무리 빡빡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몸은 이내 쏟아 냄을 멈췄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아직도 쏟아 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허다 미안해. 미안해……. 아버지는,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결코 소화할 수도, 그렇다고 내뱉을 수도 없었던 그 말을, 그래서 절박하게 참아야만 했었던 당신의 더부룩한 생애를 향해, 아버지는 취기를 빌려서야 나지막이 건네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는 문득 잠들었다.


『공터에서』의 등장인물들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돌고 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속을 돌고, 베트남 전쟁과 군부 독재 정권 속을 돈다. 그들은 생명을 부여받길 원한 적이 결코 없었지만 느닷없이 그때 태어나고 말았다. 그 세상이 낯설고 무서워, 그들은 에돌았다. 에돌다가, 세상에서 달아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맴돌다가,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겉돌았다. 겉돌다가, 어느 곳에도 터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그렇다고 그들은 오늘의 돌고 돎을 그만둘 수도 없었고, 오늘의 돎과 내일의 돎 사이를 잘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잠든 아버지의 숨소리를 한참 동안 들으며 현기증 나는 그들의 시대와 삶을 떠올렸다. 나는 아버지의 휘청거림과 비틀거림을, 아버지의 취기와 구토를, 아버지의 괜찮아와 미안해를 조금은, 정말이지 아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 말의 걸음은 힘이 없었다. 발굽이 땅에 닿는 소리 이외에 말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말은 트랙을 돌다가 물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마부가 고삐를 당겨서 물이 코로 들어갔다. 말은 재채기를 했다. 말은 가끔씩 입을 벌려서 하품을 했다. 누런 이빨이 드러났고, 어금니 사이에 철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말은 평생을 물고 산 재갈이 아직도 힘든지 혓바닥을 길게 빼서 재갈을 뱉어내는 시늉을 했다. 재갈은 벗겨지지 않았다. 말은 늙어 보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늙은 말인 듯싶었다. (…) (321쪽)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귀갓길을 떠올렸다. 지독한 어지러움 속에서도 아버지가 헤매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되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그 길. 북받쳐 오르는 무엇들을 간신히 붙잡은 채 귀갓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절실하게 내디뎠을 아버지는, 그렇게 돌고 돌아 집으로 돌아온 걸까. 아니, 공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아직 내 삶이 쏟아 낸 괜찮아와 미안해가 턱없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그랬기에 아버지의 귀갓길은 언제나 가슴 먹먹하고 묵묵했던 것일까. 잠든 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꼭. 나는 마지막으로 아무렇게나 벗겨져 있던 아버지의 구두를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봄에 마차세는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로 나왔다. 마차세는 서울 남부 순환 도로에서 동부 순환 도로로, 외곽 도로에서 중앙 도로로 하루 종일 달렸다.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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