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근 Sep 29. 2021

당신에게

제 목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지은이 : 류시화

출판사 : 열림원

출간일 : 1996년 10월 20일 - 개정판 나옴

사 양 : 110쪽 / 128ⅹ188mm

(표지는 무소의뿔에서 출간한 개정판 이미지입니다)



<1>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中 -


당신, 고마워요. 나는 말이죠,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었어요. 남들이 무엇을 보든 내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이 결국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거죠. 그렇게 내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은 시집을 주었어요. 어느 토요일 저녁, 함께 연극을 기다릴 때였지요. 그 후로 하루씩 시를 읽을 때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날 때마다 알게 되었어요 ─ 나는 외눈박이였다는 사실을요. 나는 바로 앞 사물의 거리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와 같은 곳을 바라봐 주기에 이제야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 또 고마워요. 당신이 함께 걸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 나는 외눈박이이면서 또한 절름발이였어요. 나는 내 걸음걸이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정확하고 이성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요, 그건 자부가 아니라 자만이었고, 철없는 투정일 뿐이었어요. 나는 내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가짜 시밖에 쓰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어요. 당신과 손을 맞잡고 걸을 때마다 절름거려야 했던 나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불편한 내 옆에 있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의 사랑으로 내 가슴에도 진짜 꽃이 피어나기를.



<2>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 「패랭이꽃」 中 -


시인이여, 고마워요. 당신의 시가 그 사람의 가슴에 패랭이꽃으로 피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시를 사랑하는 데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해요. 나는 패랭이꽃의 생김새, 장소, 계절을 찾아보았고 「패랭이꽃」이 인쇄된 종이 위에 따라 그렸습니다. 패랭이꽃의 꽃말인 ‘순결한 사랑’ 또한 그 아래 적었죠. 길가를 걷다가 아무 꽃이 보이면 이제는 그 꽃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고, 당신의 시를 아련히 떠올릴 것이고, 그리하여 그 사람을 절실히 떠올릴 겁니다.


시인이여, 그리고 미안해요. 이제 내 옆에는 당신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써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시인을 만난다 해도 그 사람만 못할 거예요. 시인은 종이 위에다 시를 쓰지만, 그 사람은 내 가슴 위에다 직접 시를 씁니다. 시인이여 미안해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이것이 바로 시가 존재하는 이유일 테죠.



<3>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당신이 부어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 「잔 없이 건네지는 술」 -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읽어 온 그대에게 정말로 미안해요. 그 사람이 이 글을 읽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내겐 소용없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 줘요. 한쪽 눈으로 하는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 깊이 취해 있는 것이지요.


아무쪼록, 그대도 시집을 당신만의 당신에게 건네 보길 바랄게요. 사랑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으니까요.

이전 14화 아버지의 이부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