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입사한 공단은 집과 가까워서 버스 한번 타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처음에 환영회를 하는데 거의 50명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다 계약직일 뿐이었다. 나와 비슷한 어떤 애들은 대리로 있는데, 나는 인턴이란 신분이 견딜 수 없었다. 끊임없이 본인의 일을 떠넘기는 전부장, 마차장, 김차장도 짜증나고 타회사에 지원한 필기시험 발표도 떨어져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침 하루종일 비도 내려 내 마음도 슬펐다. 토할것 같고 울고싶었다. 그런데도 회사에선 일도 못하면서 남한테 받은 화를 나한테 푸는 빌런들 때문에 일기장에는 '개씨발새끼 존나 일도 못하면서 다 죽어버려 병신같은새끼' 이런 쓰레기를 쓰면서 제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기도해도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친구들한테는 회사에 입사했다고 했지만 현실은 인턴일 뿐이었다. 집에가면 아버지는 날 봐도 본 체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해준 원조는 감사한 바이지만, 그는 항상 날 '투자했으나 그 값을 내지 못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나에게 '투자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술 취한 날이면 그는 '자신이 투자해서 내가 좋은 대학에 갔다'고 말했고 대학 순위가 올라갔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내가 대학입학을 하지 않았다면 인간 취급이나 받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은 조건부였다.
그가 세무사 공부를 하라고 해서 억지로 일요일에는 교대의 학원을 다녔다. 지금이라면 단번에 거절할 테지만, 그때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커졌다. 나와 전혀 맞지도 않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걸 계속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시험에 붙을거 같지 않았다. 학원에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있었는데, 내가 계속 이 공부를 하면 나도 그 여자처럼 될 거 같았다. 결국 그 수업은 끝까지 듣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뒀다.
공단 인턴을 하며 정규직에 지원할 기회가 있었다. 필기가 합격하고 시험도 합격했다. 1차 면접까지 됐는데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충격도 컸다. 몇 시간을 울다가 산을 떠돌아 다니다가 기도를 했다. 난 지금까지 무얼 한걸까 라는 자책과 수많은 알바의 기억과 너무 피곤한 현재가 혼재했다.
하지만 시간은 가고 어느새 계약 만료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일을 시키던 마차장과 부장은 십시일반 모아서 십만원을 주었다. 이제 퇴직하자 또 다시 무소속이 되었다.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자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지원했던 작은 신문사에서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