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17층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부산역이 크게 보이고 행인들이 아주 작게 보였다. 방문했던 아스티호텔도 보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 찰나 반팔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여행을 가면 어떤 것이든지 하나씩은 빠뜨리곤 하는 나의 습관이다. 장시간 운전으로 눈이 아파서 잠깐 침대에 누워있었다.
가까운 다이소를 찾으니 500m 떨어져 있었다. '무슨 역 바로 앞에 다이소가 한 개도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어딜 가든 역 바로 앞에 다이소가 있는 곳은 없었다. 나의 필요로 인해 그렇게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터덜터덜 다이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가는 길에 어떤 추레한 행인이 내 동선을 가로질러 거의 스치듯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난이도 헬이네'하고 걸어가는 길엔 시장이 있어 냄새가 고약했다. 새삼 아까 호텔에 체크인할 때 맡았던 특유의 향이 그리워졌다. 걸어가는 길엔 오래된 곰장어집이 있었는데 유리창을 통해 보니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주를 먹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래된 가마솥에 육수를 펄펄 끓이고 있었고 특유의 절은 내가 났다. 손님이 없는 가게 앞의 여사장은 허공을 응시하며 힘없이 부채질하고 있었다.
다이소에 도착했더니 기존 내가 방문했던 다이소와 다른 분위기였다. 시장 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행색은 초라했고 얼떨결에 들어온 나를 그들은 빤히 봤다. 조도도 약간 낮아서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스쳐 지나가는 남자에게선 고약한 땀냄새가 났다. 티를 구매하고 나오자 '아까 갔던 길과는 다른 길로 가야겠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다니면서 보니 맛집으로 추정되는 집들이 몇 개 보였고, 추천리스트에 있던걸 얼핏 본 것도 같았다. 따스한 조도로 공간을 밝힌 다인테이블에선 가족들이 고기를 굽고 있었고, 튀김전문집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늙은 남성은 어떤 중년 여성을 보고 '뭐여'라고 알은체를 했다. '오늘은 노래방 안 가셨어요?'라고 말하는 중년여성에게 남성은 뭐라 뭐라 하더니 그들은 같이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2층을 올려다보니 주점이라고 적혀있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여인과 이미 늙어버린 남성의 관계는 무얼까 유추했다. 큰길로 나오자 남녀 혼성으로 걷고 있던 중 어떤 남성이 갑자기 내 앞으로 튀어나오며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잘생겼고 그 시선이 호텔로 와서도 기억에 남았다.
보조배터리 3개를 충전하고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니 졸음이 몰려왔다. 머릿속으로는 '써야 해'라는 강박이 끊이지 않았지만 내 몸은 잘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검색을 하며 앞으로 갈 미술관과 재즈바 등을 마구마구 캡처해 사진첩에 넣어두었다. 독립서점과 빈티지샵도 생각했지만 가면 구매를 해야 한다면 또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다. 항상 구매할 때는 버리는 걸 예정하게 된다. 그래서 거의 일회용품이거나, 아니면 아주 가성비가 높은 걸로 사는 게 습관이었다. 호텔의 꼭대기층에 가면 루프탑이 마련되어 있다는 책자가 테이블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쉬고 싶다는 마음이 이겨 티브이를 켰다. 티브이에서는 이상기후를 토론하는 아나운서 2명이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귀농하여 나무를 키우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왔다. 티팟을 켜 캐모마일 티를 마셨다.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눈뜨니 8시 반이었다. 암막커튼을 치고 잠들었더니 평소보다 1시간을 더 잤다. 라마다는 일회용품을 금지해서 칫솔, 빗, 비누, 어느 것도 제공되지 않았다. 취지에는 공감했지만 빗이 없어서 머리를 감고 난 다음 손으로 빗어내려야 만 했다. 자꾸만 손가락에 걸려 머리가 빗어지지 않았다. 호텔의 샴푸를 이용해서였다. 쓰레기를 착착 버리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마저 말린 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침구를 정리하고 나왔다.
어떠한 것도 해야 할 의무가 없는 날이었다. 단지 할 일은 식사장소를 정하고 바다를 보는 일이었음 됐다. 검색하면 수많은 유명맛집이 나왔지만, 밀면은 싫어하고 취향에 맞는 진정한 맛집에 가고 싶었다. 추려진 곳은 복국집과 맑은 돼지국밥집이었는데 차로 삼십 분을 가야 했고 주차장소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픈시간으로 거르니 합천돼지국밥집을 가기로 했다. 허영만의 식객에 나온 곳이라고 했다.
가는 길은 험악했다. 길은 한없이 올라가다 한없이 내려가기 일쑤였고 갑자기 차선이 바뀌고 차선을 변경하려 치면 안전거리에 있다고 보인 사이드미러의 뒤차는 속도를 가속하곤 했다. '성격파탄자들만 있나'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끼어들기를 해주는 차를 만나면 희귀해서 고마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깜빡이에 인색했지만 경적 또한 잘 울리지 않았다. 주차자리가 건물 옆에 조그맣게 있어 들어갔더니 식당에는 중년의 남자만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에어컨 바로 앞에 앉았더니 바람이 굉장했다. 나온 국밥은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맑았고 다진 양념이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개운한 맛이었다. 먹고 나오니 계산대 옆에는 삶아진 수육이 김을 내며 올려져 있었다. 이세이미야케를 입은 여성무리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워케이션은 체류기간의 60% 이상을 센터에 큐알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특정장소만 있는 게 아닌 위성센터도 있었다. 팬시하고 고급스러운 곳을 선호하는 나는 특정지역을 가면 호텔에 가는 걸 좋아한다. 송도에 위치한 메리어트가 위성센터였다.
가는 길은 아까보다 한적했고 도착할 즈음에는 다리 옆으로 바다가 보였다. 신선했다. 바닷가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바다 옆에 집이 있는 건 아니어서 본가에서도 1시간가량을 가야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은 가끔 소래포구의 횟집에 가서 붕장어를 먹곤 했던 기억이라 바다는 나의 내면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혹은 어머니 뱃속에 있던 양수의 느낌이, 바다를 보면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걸지도.
하모와 조개구이 등 간판이 보였지만, 배가 불러서 별 생각은 없었다. 불쾌함은 호텔에 도착해서야 나타났다. 앞이 공사 중이어서 꼬깔콘이 세워져 있었고 인부들은 비상등을 켜는 동안 깔때기를 치워주었다. 하지만 기계식 주차장에 입장하자 관리자는 '어디 가세요'묻곤 '카페 간다'는 나의 말에 '오늘 행사가 있어서요 입장이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서 가고 있던 도중 다시금 생각해 보니 '그럼 어제 거점센터에 갔을 때 안내를 들을 법도 한데' 별도의 공지는 없었기에 호텔로 전화를 했다.
-워케이션으로 왔다 발레이 거절했는데 오늘 안 되는 건가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고 차를 돌려 다시 가니 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워케이션으로 왔는데 리셉션에 확인해 보니 된다고 하던데요
라고 말하자 그는 전화를 했다.
-아니 카페에 간다고 하길래..
하더니 리셉션에 다녀온 그는
-워케이션을 화이트칠판에 영어로 써주세요
라고 말하며 미안하다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나는 개저씨들의 그런 행태를 보면 항상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리셉션에 말하니 - 죄송합니다. 잘 모르셔서요.라고 말해서 -교육 잘 시켜주세요
라고 말하며 2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키친이라고 표기된 그곳엔 안내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 인기척을 냈지만 응답이 없어 루프탑에 갔지만 땡볕아래 테이블 몇 개 외엔 없었다. 다시 내려오려는 순간 직원을 발견했다.
-워케이션으로 왔는데 리셉션에서 22층으로 안내해 주더라고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니 그는 한 직원을 불렀다.
-오늘 행사가 있어서 그 옆공간에서 하시면 돼요
라고 말하며 엘베를 탔다. 2층 카페 옆 별도의 섹션이 있었고 그에게 화를 내도 바뀌는 건 없으니 참았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해방감을 주었고 커피를 청해 마셨다. 바닷가에 올 때 백사장을 걷는 것보다 에어컨이 나오는 별도의 공간에서 감상하는 것 또한 만족을 준다. 사람들은 웃통을 벗고 선탠 하거나 수상스키를 탔다. 케이블카가 유유히 지나가고 근심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할 때마다 실제삶도 이러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건 요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