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친척을 만나러 서초에 다녀왔다. 어릴 때부터 각별했던 그녀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생활로 바빠 한동안 연락을 못하다가, 친척동생의 결혼식으로 인해 만나 한번 가서 자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막상 주말이 되니 너무나 익숙해진 혼자만의 시간이 없고 버스를 타고 가서 선물을 사고 마을버스를 갈아타는 여정에 진 빠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말을 누군가와 보낸다는 기대감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버스를 타니 토요일 오후의 고속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비로소 서울에 진입했다는 실감이 났다. 평소 시간보다 더 걸려 도착한 터미널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신세계 백화점에서 케이크를 픽업해 버스를 타니 또 한나절이었다. 도착하니 그녀는 요리도 못하면서 한우랑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5년 만의 만남이었다. 명절 때도 각자 해외를 가고 방송일을 하는 그녀와 생활반경이 너무 달라지게 되며 멀어졌던 사이는 유년시절을 함께한 덕인지 금세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혼자 삭혀왔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얻은 상처를 그녀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욕해주었다. 어쩌면 이런 관계가 가장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런 아픔들을 사회생활 하면서 알게 된 친구에게 말했을 때도 친구는 위로해 주었지만, 내 아픔에 감응해 주는 사람은 역시 피가 섞인 사람이었다.
친구가 사우나를 가자고 해서 밤 10시에 오피스텔을 나섰다. 강남의 거리는 점멸하는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평소완 너무 다른 시간개념에 해방감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나체로 돌아다니고 있는 탕 내는 너무나 어색했지만, 그녀와 등을 밀어주며 그런 부끄러움은 사라졌다.
다음날 거의 정오가 되어서 일어난 다음 남양주의 카페를 갔다. 한강은 윤슬로 빛나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 얘기를 하며 울었다. 알고 보니 다정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부도 인간으로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서로가 알고 있지 못하던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마다 감정은 고조되었다. 어느 날 내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이혼하고 싶다고 울면서 이야기한 것을 그녀만 보았다며 이야기했을 땐, 죽어도 이혼을 안 하겠다는 어머니가 애써 자식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함임을 알았다. 어릴 때 그녀가 차라리 이혼했으면 좋겠다고 수십 번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그 이후의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꾸역꾸역 참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몇 살 더 먹었을 그때의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만 했을까.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론은 결혼 안 한다고 닦달하는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아이를 낳고 본인이 느꼈던 것들을 자식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지 않을까라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돈이 너무 중요해서, 돈에 결핍된 인간으로 성장하게 만든 다음 돈에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어폐가 있는 일 아닌가. 단지 생존해야만 했기 때문에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0에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상황이 너무 애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이미 자식은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으며 자랐다. 그럴 과정을 반복할 바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삶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아이를 낳는 삶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완벽한 타인이고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하는 삶을 살 바에야, 모든 사람이 날 욕해도 한 사람만 어떤 일에도 날 믿어줄 사람이 있으면 생각되는 가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