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아 Oct 30. 2024

바뀌는 인간관계

성희와 친하게 된건 그녀의 수더분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시락을 같이 먹었고 매점을 같이 갔다. 반에 형주라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장난기가 많아서 얼마 되지 않아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성희는 형주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그가 말을 걸면 얼굴에 엷은 미소와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나야 뭐 그런건 상관 없었다. 형주는 키가 작아서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반에는 태준이라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키가 180이 넘고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마스크가 좋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급이 있다는걸 알게 된 것 같다. 태준에게는 내가, 내가 형주를 남자로 느끼지 않은 것처럼 친구라는 선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준이같은 애는 나보다는 더 높은 급을 바라본다는걸 그가 다른 여자를 볼 때의 눈빛이나, 내게 말을 걸때의 형식적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쉽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냥 태준이를 보면 '아 잘생겼다'외는 그와 사귀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말을 거는 남자애는 따로 있었다. 나는 딱 7의 여자였다. 연예인급은 아니지만 긴 생머리와 일반적인 여자애들이 입는 랄프로렌같은 걸 일상복에 잘 녹여낼 줄 알았고 그런 트렌디함이 걔네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것 같았다. 어짜피 최상급은 그들만의 리그이니, 나는 상대적으로 최상급이 아닌 남자애들의 관심이 가는 상대였던 것이다.


반에는 종엽이가 있었는데, 처음엔 그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도 조용한 성격이기도 하고 나야 워낙에 할일만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서로 말을 섞을 기회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게 깨지게 된건 6월쯤이 된 후였는데, 그때는 어느정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반 애들끼리도 친해져서 수업이 끝나면 밥을 먹으러 가거나 민증이 있는 애들을 이용해 선술집에 가곤 하는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이미 커플도 생겨서 유진이와 수경이는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둘은 매일 별일 아닌 것 가지고 투닥거리고 삐지고 하는 게 내 입장에서는 '왜그리 힘을 빼지?' 의아하게 보인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경이가 유진이를 보는 눈빛이 귀찮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서 알 수 있었다. 유진이가 '나중엔 여자가 더 좋아한다'는 말을 쪼개면서 말할땐 '얘네 벌써 진도를 어디까지 뺀거야?'생각되었지만 그저 추측할 뿐이었다.




한번은 애들끼리 노래방을 갔는데 그때 유행하던 노래는 브라운아이드소울, 포맨 등 감성발라드가 주를 이뤘다. 여자노래의 경우는 거미, 빅마마, 윤미래 등이 인기가 많았는데 그때 T를 즐겨 부르던 여자애가 있어서 그걸 들으며 '와 존멋이네'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겉멋에 빠져 나도 부지런히 노래방에 갈때마다 나만의 색이 묻어있는 노래를 부르려고 했던건 노래를 잘하는게 상대방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공간에서 영수가 부른 노래는 이상하게 거기를 나온 이후에도 생각이 났고, 그건 공부를 끝내고 가는 기차 안에서나 잠깐 틈이 나서 강의실을 옮긴다던지 하는 순간에 그를 생각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친이 있었고 교대를 다니는 재원이라고 했다. 그녀의 사진을 그가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을 때 '생각보다 예쁘진 않은데, 내가 이길수도 있을지도'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들었고, 나는 그의 마음을 돌려 내게 향하게 하고 싶었다.


그때쯤엔 영수랑 둘이 뭘 같이 많이 했다. 그냥 공부를 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면 영수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날이 있었고 강의실을 옮겨 자습을 하고 돌아오면 그가 '어디 갔었어'라고 묻는 날들이었다. 그와 같이 간 노래방에서 그는 감정이 고조되는 듯이 무릎을 움직이며 옆에 앉은 내게 닿게끔 했는데, 나는 그 순간에 그가 나에게 뭔가를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게 따듯한 눈빛이든, 은근히 잡는 손이든 원했지만 그는 노래를 번갈아 부르고 나선 순전히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간 것처럼 행동하는 건 그의 마음이 뭔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공부나 하자'라며 학원에 붙는 탑100에 들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때 애들은 다 신기해했다. 우리반이 최상급반이 아니었을 뿐더러 나처럼 괄목할 상태를 보여준 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는 타의로 들어왔지만 매달 들어가는 80만원의 학원비와 고등학교 친구들이 누리는 대학생활에 대한 보상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야만 했다. 남자애들과의 친밀함은 생경하고 즐거웠지만 그걸 위해 내 미래를 포기한다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큰 것이었다.


애초에 친구들은 그렇게 간절해서 들어온 친구는 없는 것 같았다. 나처럼 타의로 들어오게 된 애들이 다수였고, 거의 일년에 천만원이 들어가는 학원을 보내줄 정도로 유복한 친구들이었다. 딱히 대학을 잘 가지 않아도 부모가 마련해둔 재산을 물려받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친구들이 내게 그들을 정의한 것들이었다.


수능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영수는 여느날과 같은 똥 마려운 강아지같은 표정을 날 보며 했다. 그게 관심이었는지 미련이었는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는지 모르겠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당장 내일 모레가 수능이었고 수업 마지막 날에는 간단히 짐을 챙겨 수능을 볼 장소를 사전답사하고 집에 갔다.


수능 전날에는 역시나 어머니의 종종거림이 눈으로도 보일만큼 온 가족의 긴장이 내게 전해져 왔다. 두번은 실패하면 안된다는 강박과 여러번 쳐본 모의고사의 갈수록 나아가는 성적도 이번에는 잘 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했다. 아버지는 여느날과 같이 별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 들어갔고 단지 가족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반찬을 뭘싸지'내게 물었고 나는 항상 그렇듯이 '아무거나 해요'라고 했다.


당일에 아침은 시릴듯이 추웠다. 옷을 싸매도 한기는 스며들어왔고 꾸역꾸역 찾아간 고사장엔 공교롭게도 재수학원에서 만난 초등학교 동창 은경이도 같은 반이었다. 1교시 언어를 풀었는데 너무 명쾌하게 답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천성이 예민한 나는 첫 수능은 너무 긴장해서 망칠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보는 것들은 2교시에도 명확하게 답이 나오고 점심을 먹고 나서도 별도의 식곤증 없이 3교시까지 무난하게 마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시험을 마치고 찬바람을 뚫고 집에 돌아왔을때 어딘가 헤실해져버리는 마음을 갖고 누워있었다. 역시 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시험에 대해 물었고 그제서야 가채점을 시작했다. 언수외에서 총 2개를 틀렸을 정도로 잘 본 시험이었다. 나는 만면이 화색이 되어 '나갔다 올게요'라며 밤마실을 나갔다 왔다.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 강제입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