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만 전남자의 소생은 못 거두겠어

by 강아

그는 부유했다. 스테이지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춤을 추고 있던 날 그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내 번호를 묻고 애프터를 기약했다. 그는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의 원장이라고 했다. 사업을 확장하여 은평구에 분점을 냈다는 그는 다음 만남 때 벤츠 SUV를 끌고 왔다. '아는 형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대신 차로 받게 됐어'라고 하는 그에게 창문을 열고 나는 무료하게 담배를 필뿐이었다. 꽁초를 창밖으로 버리자 '여기 재떨이 있는데'라며 그가 알려주었지만, 이미 밖으로 버린 후였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무색이고 희미했다. 상대방이 내게 갖는 감정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불안정한 토대 위에 관계를 쌓아나가야 했다. 그와의 관계 또한 그저 그가 만나자고 해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만났던 것이었다. 그를 만나던 날도 숙취에 절어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한강을 걷고 영화를 봤다.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것이 데이트의 시작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걸로 환희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를 세 번째 만나기로 한 날은 그의 학원이 있다는 마포에서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그와 이야기할수록 어떤 명징함보단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랑 있으면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비일상의 기분이 들었다. 그가 몇 번 있으면 고백할 거란 느낌도 왔다. 그는 사업에 신경 쓰느라 여자를 만난 지가 오래됐다고 했고 '그럼 전 연애는 어땠는데?'라고 물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라고 그는 말했다. '근데 왜 결혼하지 않은 거야?'라고 내가 물었다. '그 사람에게 애가 있었어'라고 말하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랑하는데 전남자의 애는 거둘 수 없는 건가? 그럼 그게 사랑인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싱글인 남자가 그 아이를 거두는 것도 어렵겠거니 싶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그 이후로도 몇 번 지속됐다. 하지만 대화의 중간에 나는 그의 이야기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순간순간 외국어를 듣는 듯한 혼동이 찾아왔다. 그런 건 굳이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도 나와의 불통은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그와는 몇 번의 식당을 더 갔다. 이태원의 젤렌에서 밥을 먹고 길가를 걸으며 '원래는 패션에 관심이 없다가 한 번은 천만 원의 옷을 지른 적이 있거든. 띠어리도 그때 알게 된 브랜드야'라며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하지만 무엇도 빛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띠어리도, 사장이란 직함도, 그의 어머니가 한국요구르트집안사람이라는 것도 '그' 자체가 빛나보이지 않는 '배경'들이었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나를 위해 그의 회사 회원권이 있다는 글래드호텔을 예약해 준 적이 있었다. 그가 카드키를 건네주던 순간 그는 '올라가 봐도 돼?'라고 했다. 나는 즉시 표정을 구겼다. 그러자 그는 '침대에 누워만 있다 올게.'라고 하며 그 말처럼 정말 룸 내부가 궁금했던 것 마냥 찰나의 시간만을 텀을 두고 되돌아왔다. 그 숙소에서 잠을 자고 난 다음날 그에게 고맙다는 말이든 어떤 말이든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 또한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의아하게 생각하며 시간은 일 년이 지났고 이년이 지났다. 그렇게 그는 번호를 바꾸며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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