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일이 고되지도 않았는데 집에 오니 진이 빠진다. 생각해 보면 사회생활이 그렇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회사라는 공간 자체는 사람의 기를 빨아먹는 것 같다. 그저 앉아있으면 딴짓을 하다가도 이게 맞는 건가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버리고 있네 이런 생각만 든다. 그마저도 네시까진 계속 그러다가 보스는 회의가 끝나서 돌아왔다. 그 사이에 계장이 전화가 왔는데 못 받은 모양이었다.
내게 무슨 일로 (계장이 전화했을까) 물었고 나는 청에서 로데이터를 못준다고 했다. 그러더니 전화를 해서는 한참 설명을 하더니 내게 다시 물었다. 나는 1청에서 안 주는 게 문제가 아니고 2청에서 작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잘못 설명했네'라며 다시 계장한테 전화했다.
민감정보를 주기가 뭣해서 가림막을 하고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위해 백자료도 마련해 놨다. 기존대로 줄 것을 요청했지만 청의 의도를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제1청이랑 협의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서 설득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고 그쪽에서 그렇게 주면 그렇게 받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무도 전화를 몇 번 왔다 갔다 통화하더니 결국 '식별불가능하게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그걸 계장이 보스한테 전화해서 내일 직접 찾아가겠다고 같이 가자고 한 내용이 요였다. 나는 작년에 그 프로세스를 겪어봤기에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년 계장도 알았는지 일정이 있다며 회의장소에 오지도 않아서 나와 업체만 고생하고 왔었다. 하지만 새 계장은 의욕이 너무 넘쳐서일까 이미 약속까지 잡아놓은 것이었다.
보스는 (계장이) 같이 가잔 말에 알겠다고 하고 외근을 올리라고 말했고, 나는 '우리가 요구하는 포맷으로 전달하면 그쪽에서도 안 줄리 없을 텐데요'라고 말했고 그는 다시 계장한테 전화를 했다. '0 과장이 그러는데 그쪽에서 자료를 줄 것이고 안 가도 될 것 같다는데요'라고 하자 계장은 이미 잡은 약속인데 가자고 말했다. 나는 가기 싫었다. 그제야 보스는 원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난 이 모든 과정에 대한 기시감이 들었으며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탁상행정, 내 의견을 말하고 그게 진실임에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행, 나의 말이 옳음에도 계장은 굳이 보스에게 전화해서 내가 주무에게 말했던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게 만든다. 일을 내가 더 오래 해서 더 많이 아는데 그들은 말하면 '그렇습니까'라고 하는 형국이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게 너무나 지겹다. 그리고 그만하고 싶다. 보스에 대한 권위도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내가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없는데 회의를 갈 때마다 내 차로 이동하고 그러는 것도 다 마땅지 않다.
보스를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면 이런 문제는 하등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그가 자기 짐을 같이 치우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던 날부터 나는 모든 의욕을 잃고 그의 말투 냄새 목소리 모든 게 역겨워졌다. 누군가와 결혼하고 이혼하는 과정도 이와 같을까? 그래도 그들은 사랑했던 과정 후에 싫어하는 과정을 겪는 거라지만 나는 보스를 사랑한 적도 없이 혐오만 할 뿐이다. 이건 '그'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냥 이 회사에 들어와서 겪은 보스 모두가 다 무능하고 예스맨이었을 뿐이고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이런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마저 역겨워졌다. 하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나도 한심하고 그럴 때면 정말 토할 것만 같다. 내일도 가지 않아도 될 회의를 가서 멍한 표정으로 자리만 채우고 올 내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여길 벗어나기 위해 써야 하는 문서조차,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무력감에 돌아버릴 것만 같다. 이런 건 누구에게 말해도 단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다. 그저 말미에는 싸구려 자기 연민만이 남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