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안 갔다. 검진이 있는 날이었는데 회사를 하루 안 가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컸다. 검진은 삼십 분도 안되어 끝났고 어지러워서 식사를 하니 아직도 12시였다. 회사를 안 다니면 시간여유가 어마어마하구나를 다시 체감한 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한 뒤 미팅장소로 향했다.
커넥팅 하는 모임이었는데, 작년에 비슷한 행사를 갔다가 좋은 영감을 받아서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나밖에 자리에 없었고 확실히 작년엔 대행사가 있었다면 이번엔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는 거라 예산도 그렇고 운영방식도 미흡했다. 역시 처음엔 각자 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고 그전에 작년에 봤던 변리사는 올해도 내게 명함을 줬다. 명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렇게 소개가 이어졌는데 한 대표는 매출이 30억이라 그랬다. 그걸 듣고 기가 죽어서인지 내가 추구하는 미팅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금방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집에 오는데 왠지 열패감이 뒤따랐다. 그와 난 비교할 처지도 아닌데 호기롭게 무언갈 시작하겠다고 하자 시작부터 격차가 너무 크니 엄두조차 안나는 것이었다.
라이선스를 왜 따지 못했나. 나는 왜 사업체가 없는가. 를 생각하다 보면 나는 왜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건가까지 이어진다. 극복하려고 시도를 많이 했지만 가끔 큰 벽에 부딪힌 거 같은 느낌을 받을 땐 나는 무기력해졌다. 분명히 써야 할 계획서도 있었고 분석해야 할 것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스크롤을 내릴 뿐이었다.
여행을 갈 에너지도 바닥이 난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면 쓸 수 있는 시간이 욕심나면서도, 오늘같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한 날에는 죄책감에 돌겠다. 누군가'(본인이) 쉬는 것에도 화를 내더라고요'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고 꼭 내꼴이었다.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오히려 휴무여서 좋아야 할 날에 기분이 다운되어 요가를 다녀오기까지 저기압이었지만, 요가를 다녀와서도 기분은 쉽사리 올라가지 않는다. 투자를 하니 이런 내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컨트롤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저하되는 기분을 무시해야 하는 것도 힘이 든다. 북유럽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감정을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어서라고 하던데, 내가 지금 그런건가?
막상 누군가에게 말해도 해결되는 것이 없고, 뒤이어 말한 걸 후회할 나를 알기 때문에 더욱 답답할 뿐이다. 심지어 상대가 해결책을 제시해 줘도 스킵하거나 탐탁지 않아 할 거면서, 들어주면 '들어주는 것뿐밖에 못했잖아'라고 할 나도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모르겠다. 막상 사업체를 운영해도 또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스트레스 때문에 또 고통받을걸 알면서도 남보다 더 많이 갖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런 비교가 날 더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닌 것도 알면서도 주기적으로 이런 감정은 반복된다.
뛰어난 연주가가 되었다한들 나는 행복했을까? 결국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끝없는 미련만을 가지며 살아가는 게 디폴트 아닌가? 나이가 들면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더 수용적이 되고 포기하게 되는 건가? 나다운 걸 찾겠다고 하며 이제 누구인 척하지 않을 순 있게 되었는데 한 번씩 드는 자괴감은 잠수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런 때가 있으면 좋을 때도 있단 걸 알지만 좋은 순간이 온다 해도 또 최악을 생각하고 말 내가 오늘은 지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