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정된 보고자료를 주더니 이걸로 상위기관에 보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작년과 3년 전 데이터를 바꾸지 않고 올해 것만 발표한다고 말했다. 수정작업을 하지 않은 이유는 국장까지 보고를 해야 하는 게 그게 부담스러워서 인 것 같았다.
뭐 그들 사이에서는 정확한 것보다 사고를 안치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가 지시사항을 말하자 나도 '그럼 공고 올려도 되죠?' 했더니 그는 할 말만 하고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그러더니 올린 기안을 보고 '00' 소리를 지른다. 그땐 상위기관과 민원에 관련된 전화를 하고 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내가 이웃집 노비도 아니도 시도 때도 없이 상스럽게 부르는 게 맞아?'라고 생각될 즈음 주무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에게 통계포털에 민원인이 요청한 자료가 나와있지 않아 데이터로 파일을 송부했지만, 업체 측에서는 통계 DB에 입력을 했다고 확인했고, 민원인은 예전엔 확인했던 데이터가 지금은 없어 요청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매사 덤덤하고 안정적이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나의 상사이다.
그는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다가 '이거 매출액 문구 넣었어?'라고 말했다. 지가 문서를 보면 될걸 예전에도 물어본걸 또 물어본다. 그때도 넣었다고 말했는데 그는 내 말을 안 듣는 거다. 이제 와서 관계를 회복할 의지도 없다. 어차피 나는 싫은 사람과는 안 맞는다는 걸 유년시절부터 학습해 왔고 그걸 과거에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의 탓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인정하고 그런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그걸 타인은 싹수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바꾸기 싫다. 생각해 보면 그가 지금껏 틀려왔다. 잘못된 업무지시, 상위에게 전화와도 본인이 아는 게 없어 내게 보고받고는 자신의 지식처럼 포장하기, 본인도 기관장을 무시하면서 내가 그의 말에 말대답을 하면 아니꼽게 여기고 그걸 복수하려고 사무실에서 고성을 지른다. 그는 그걸 '본인이 까칠하다'라고 표현하지만 그걸 사람 가려가며 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왜 선배는 아침에 인사해도 뭐라고 안 하면서 내가 인사 안 하면 뭐라고 하는가? 왜 누군가에겐 친절하게 대하면서 내겐 하대하는가? 이런 걸 일일이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서 그냥 눈에는 눈 하기로 했다.
그가 나를 막 대해도 타격이 없는 건 그의 말이 내게 유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긴 회사생활을 하며 배우는 건 멘털이 세진다는 거다. 자아가 작던 20대에는 내가 틀린 거고 고쳐나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끌고 나갈 업무영역이 있으며 전문성이 있다면 그게 상사고 타기관의 윗사람이라 해도 반박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건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윗사람에게 대드는 건 버릇없는 것'이 아닌 '윗사람이건 머건 내 할 말은 해야' 속에 얹힌 게 없게 된다는 걸 배웠다.
통화를 끝내고 그에게 갔을 때 그는 그 30초~1분가량의 시간에 분이 풀려 다른 자료를 검토하며 내게 말했다. 왜 언성을 낮추며 말해도 될걸 높여서 말하는지는 '그가 내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사무관에게 전화가 왔다. '고생하셨어요. 훌륭해요'그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상사의 지시는 듣을 게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어쩌면 상사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도 내가 본인을 인정 안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50이 되어도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은 버릴 수 없는 건가 보다.
그러던 중 후배직원의 컴퓨터를 그가 지나가다 봤나 보다. 유공표창의 공적조서를 작성하는 후배에게 '그거 작성하지 마'라고 한다. 상사가 상을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본인 혼자 공적조서를 쓰고 있는 후배도 웃기고, 그걸 상 받게 하기 싫어 쓰지 말라고 하는 상사도 웃긴다. 서로를 추켜올려야 할 팀 내에서 서로를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상사면 고생한 업체에게 공적조서를 작성하라고 하며 위신을 높여줬을 것이다. 그게 나를 높이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사의 마음은 '내가 제일 고생했는데 팀원이 받아? 내가 받진 못하고?' 하는 생각인데, 상위기관이 그에게 상을 줄리도 없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웃겨서 코웃음 치며 퇴근시간이 되어 회사를 빠져나왔다.
연휴만 기다리고 있다. 막상 그날이 되면 유수처럼 흘러가 버릴 테지만, 싫은 사람을 안 보는 행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