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호수(Loch Earn)
던디에서 오전을 보낸 우리는 곧바로 던디를 떠났다. 옆으로 큰 강이 흐르는 던디가 꽤 매력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은 던디와 같은 도시를 보는 것보다 하이랜드 로드트립이 우선이었다. 혹시나 가는 길에 필요할지도 모를 비상 식량을 던디에 있는 테스코에서 조금 산 후에, 우리는 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의 하이랜드 로드트립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말로만 듣던 하이랜드인데, 그 풍경이 얼마나 멋질지 너무 궁금하다."
스코틀랜드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던디에서 우리는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멈출지 미리 정하지 않았다. 이날 정해놓은 숙소까지 가는 길에 멈추고 싶은 장소가 보이면 그때그때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일단 이날 우리는 하이랜드 로드트립의 핵심 중간 경유지인 글렌코(Glencoe)까지 가기로 했다. 우리가 출발한 던디에서 글렌코까지는 쉬지 않고 달리면 약 3시간 남짓 걸리는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이다. 그렇게 방향을 정하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도시를 벗어나 자연 풍경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바라보면서 운전하다 보니, 운전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운전하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하이랜드 초입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데, 문득 더 북쪽의 풍경은 얼마나 장엄할지 기대감이 커졌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계속해서 더해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호수 있다! 잠시 멈췄다 가자."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는 작은 마을에 잠시 멈췄다. 우리가 멈춘 곳은 세인트 필란스(St Fillans)라는 곳으로, 지도에서 볼 때 이 마을 바로 옆에 언 호수(Loch Earn)라는 이름의 큰 호수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정말 많다. 그래서 로드트립을 하면서 많은 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호수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어느 호수를 선택하더라도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결코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로드트립을 떠났던 우리가 하이랜드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호수가 바로 언 호수였고, 첫번째 호수이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글래스고(Glasgow)나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여정을 시작하면 이곳까지 오는 길에 이미 호수를 몇 개 지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던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언 호수가 우리의 여정에서 만나는 첫 호수였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하이랜드로 들어온 것을 비로소 체감했다. 우리가 멈춘 마을은 건물도 몇 개 없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분위기가 너무나도 조용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마을 앞길을 지나는 차들도 별로 없었다. 잠시 마을을 둘러본 우리는 호수를 보기 위해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갔다. 짧은 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나무가 가득한 수풀이 나오고, 그 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하나가 나타난다. 이 호수가 바로 언 호수이다. 지도상으로 이 호수를 보면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데, 실제로 보면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가도 10분 이상 달려야 하는 먼 거리인 데다가, 우리가 멈춰 선 세인트 필란스는 언 호수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니 호수 끝이 보일리가 만무했다.
"참 묘하다. 어떻게 설명하기 힘드네, 지금 이 감정을."
흐린 날씨 탓에 안개와 구름이 자욱하게 낀 호수는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호수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이어지는데, 우리는 그 산책로를 잠시만 걸어보았다. 호수가 워낙 커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고, 그냥 그곳의 분위기만 느껴보기 위해 잠시 거닐었던 것이다. 호수를 옆에 두고 걷는 그 순간은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황홀했다. 완전히 자연 속에 동화된 듯한 느낌과 현세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함께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곳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하이랜드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는 성취감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참 묘했다. 일종의 감동일 수도 있고, 황홀함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만족감일 수도 있다. 오롯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순간 나는 너무도 이상한 경험을 했고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이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다면 짝꿍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문득 옆을 돌아보니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짝꿍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짝꿍도 이 호수와 그 주변의 풍경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 어떤 단어로도 묘사하기 힘든, 너무도 신비롭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 평화를 깨뜨릴까 두려워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마주한 하이랜드의 풍경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시간도 잊은 채 언 호수를 한참이나 감상했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똑같은 모습인데 이상하게도 볼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서 같은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앞으로도 더 멋지고 장엄한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때만해도 우리는 그 미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으로 마주한 하이랜드의 멋진 풍경 앞에서 경건하게 그 모습만을 감상할 뿐이었다. 한참동안 이리저리 호수를 둘러보던 우리는 그 신비로운 수풀을 빠져나와서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를 몰고 호수 옆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호수를 따라 가는 길에 호수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여럿 있는 것 같아서, 가다가 다시 멈춰 서기로 한 것이다.
하이랜드에 있는 큰 호수에는 그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꽤 많이 있다. 포인트 한 곳을 그냥 지나치더라도 조금 더 가다보면 다른 포인트가 나오기 때문에, 어느 한 장소에 크게 집착할 필요는 별로 없다. 물론 호수에 따라 조망 포인트가 한 두개만 있는 호수도 있고, 포인트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래도 어느 장소에서나 아름답고 장엄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변함이 없다. 언 호수도 길에 이어지는 호수를 따라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꽤 여러군데 있었고, 그 장소마다 작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디서 다시 멈춰볼까 고민하면서 가는 길에 캠핑카 여러대가 주차되어 있고, 텐트도 두 세개가 보이는 장소가 있어서 얼른 차를 세웠다. 이렇게 캠퍼들이 찾는 곳은 대부분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를 세운 그곳은 언 호수의 거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다른 모습이었다. 잔잔한 호수와 여러 겹의 산,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낮은 구름과 같은 구성 요소는 똑같았지만, 그 조합이 달라지면서 풍경도 달라진 것이다. 역시나 캠퍼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바로 앞에는 물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는 온통 산뿐인 데다가, 이곳을 지나는 차들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너무도 평화롭고 조용했다. 우리는 캠퍼들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아주 작은 파도가 자갈을 간지럽히며 내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오고, 낮은 구름을 매달고 있는 주변의 산은 신비감을 더했다. 조금 걷다보니 호수 위를 이리저리 오가는 오리 가족이 있었다. 어미 오리는 열심히 길을 찾고 새끼들은 어미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 이 풍경 안에 더해지니 너무 아름다웠고, 이 고즈넉한 감성을 증폭시켰다.
그렇게 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산책하며 머물던 우리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예약해 둔 숙소까지 가야했기에, 그리고 중간에 또 어디서 얼마나 자주 멈추게 될지 예상할 수 없기에 아쉽지만 언 호수를 이제는 벗어나기로 했다. 하이랜드 여행을 모두 끝낸 지금 돌아보면 이 로드트립을 하는 동안 사실 이 호수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많이 감상했다. 하지만 이 풍경이 기억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아마 첫 경험의 강렬함 때문이 아닐까. 하이랜드 자연풍경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기에, 그 인상이 더욱 깊게 새겨진 듯하다. 이렇게 우리는 언 호수를 떠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를 더 깊숙하게 들어가기 위해 다시 길 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