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파치(Corpach)
우리는 글렌코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떠보니 전날과는 다르게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반겼다. 하이랜드의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다고 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서둘러서 숙소를 나섰다. 오늘 우리는 하이랜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포트 윌리엄(Port William)을 거쳐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길을 가던 중에 코파치라는 아주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 잠시 차를 세웠다.
"여기 마을 진짜 예쁘다. 기차역도 그렇고, 앞에 풍경도 정말 멋지네."
코파치라는 마을에 우리가 멈춰선 것은 우연이었다. 포트 윌리엄이라는 동네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하던 차에 아침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갑작스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화장실 표지판을 보고 무턱대고 들어간 곳이 바로 이곳, 코파치였다. 마을 입구에 주차장이 꽤 크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우리는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차를 대고 내렸으니, 이 마을을 한번 둘러보고 가기로 한 것이다. 마을 규모에 비해서 주차장이 꽤 넓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고, 그 생각에 코파치라는 마을에 대한 호기심이 동했다.
주차장에서 벗어나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기찻길을 건너게 된다. 이곳 기찻길은 단선이었는데, 기차가 한방향으로만 다니는 건지 아니면 양방향을 단선으로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다. 기찻길을 건너면서 바로 옆에 있는 기차역을 돌아봤는데, 그 역에서 정감이 가득 느껴졌다. 아기자기하면서 고즈넉한 이 시골마을의 이 작은 기차역은 마치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모습이었다. 기차역을 지나서 조금 더 걸어들어가니까 작은 마을과 푸릇한 잔디밭이 나타났다. 잔디밭 위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내리쬐는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넓은 호수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풍경을 감상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바로 옆에 물이 있어서 그런지 여름이지만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는 얼른 물가에서 벗어나 마을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마을과 잔디밭을 나누는 운하가 있었다. 이 운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물 색깔이 다소 까맣게 보이는 걸로 봐서는 꽤나 깊어 보였는데 아무런 안전 장치가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무서웠다. 안전을 위해 펜스를 설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작은 마을에 위치한 이 운하는 사실 스코틀랜드에서 유명한 칼레도니아 운하이다.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하이랜드 북쪽의 인버니스(Inverness)와 남쪽의 포트 윌리엄을 잇는 정말 긴 운하이다. 이곳은 운하의 남쪽 끝부분이라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인데, 운하를 따라서 위로 올라가면 운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마을이 많았다. 칼레도니아 운하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이 운하를 여러 번 지나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운하 옆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운하는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운하 위에는 많은 오리들이 유유자적 헤엄치고 있었고, 운하 규모에 비해 비교적 큰 배가 한 척 정박되어 있었다. 그리고 운하 건너편으로는 마을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운하 옆에 있는 싱그러운 잔디밭 위를 걸으면서 평화로운 마을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바람만 조금 덜 불었으면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서 잠시 쉬었다 가고 싶었을 정도로 마을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잔디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니까 광대한 규모의 에일호(Loch Eil)가 나타났다. 그리고 호수 모래사장에 난파선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보기에는 정말 오래된 난파선이었는데, 실제로는 2011년에 푹풍우에 휘말려 좌초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좌초된 배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찬 바람에 파도가 일렁이는 에일호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바다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로 규모가 큰 이 호수는 'ㄱ'자 모양으로 꺾여있는 다소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물론 큰 호수라서 육안으로는 그 형태가 보이지 않고, 지도에서 봐야 그 모양을 알 수 있다. 그 중 코파치 마을은 호수가 꺾이는 지점 근처에 있다. 전혀 사전 정보가 없었고, 단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들렀던 마을이었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만큼 마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그 뒤로 이어지는 산세의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는 우리가 계획한 장소를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코파치 마을을 떠났지만 에일호는 떠나지 않았다. 에일호가 우리 가는 길 왼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작지만 아름답고 고즈넉한 코파치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