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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Jul 14. 2021

승부수

다가오는 평가의 순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목표가 있었다. 매주 금요일에 치러지는 받아쓰기 시험을 다 맞는 것.

 중학생이었던 나는 목표가 있었다. 이번 기말고사를 잘 치러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는 것.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목표가 있었다. 이번 수능을 잘 치러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  

   


 학창 시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국어, 수학, 영어를 배웠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 때, 슬기롭게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웠고 마지막으로 ‘계획’을 배웠다. 학창 시절에는 매번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갔다. 짧게는 이번 주 받아쓰기부터 3년 후 수능까지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그 기간만큼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여러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받아쓰기 공부를 하고 틀린 문제를 복습했으며, 공부를 하는 와중에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다 어떤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오자, 언제나 목표를 던져줬던 이들이 사라졌다. 부모님은 내게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셨고 몇 점을 맞으라는 선생님도 없었다. 학점이란 명백한 지표가 있었지만, 그 학점에 찍히는 숫자들은 학창 시절 내신과는 달리 굉장히 관대했다. 10프로가 만점인 4.5를 가져갈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30%까지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높은 학점이 담보하는 것은 연구자의 길 정도였다. 오히려 너무 높은 학점은 취업에 방해가 되며, 사회는 대학생에게 ‘공부’보다는 ‘경험’을 요구했다. 적당히 높은 학점에 풍부한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인재가 되었다.

 적당히 높은 학점과 풍부한 경험. 사회 초입에 들어선 사회 준비생들은 이 매력적인 형용사들에 혼란스러워진다. 지금까지는 전교 1등, 학급 1등, 전국 1등급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학생들이다. 그런데 사회는 등수가 매겨지지 않았다. 정성적인 것들이 더 많이 작용하는 룰이었다. 사회는 대학생들이 해왔던 공부보다 어떤 자유를 보냈는지 궁금해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서 학생들은 방황한다. 술을 마시며 세월을 부르짖는 것이 자유인지,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자유인지,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자유란 그런 것이니까. 이런 애매모호한 자유라는 단어 속에서 젊은이들은 인생을 매듭짓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오늘까지는 공시생이었다가, 내일부터는 백종원을 꿈꾼다. 그들의 삶 전체가 자유지만, 어딘가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처럼 보인다.


 내게 학창 시절은 끝이 있었다. 받아쓰기는 이번 주면 끝나고 수능도 언젠가는 끝난다. 거의 모든 것이 딱딱 정해진 시간의 굴레를 따라 지나간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무원 시험은 무언가를 나누는 시험이 아니라 ‘커트’를 넘어야 하는 시험이다. 좋게 말하면, 능력에 따라 빨리 마무리지을 수 있는 시험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하염없이 공부만 하다 허송세월을 보내기 좋은 시험이기도 하다. 공무원 시험뿐일까. 식당 창업, 취업 준비, 대학원 입시 그 모든 것에 기약은 없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말을 평생 들어온 이들에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실패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다.

 그래서 몇몇은 자신의 포텐셜을 높이기 위해 결정의 순간을 뒤로 미룬다. 교수라는 직업이 대표적이다. 교수란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이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사회적 위치도 높은 편이다. 게다가 ‘공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딱 맞는 직업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자리다. 자리가 없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분야 교수가 죽어야 한다. 게다가 학령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여러 지방의 사립 대학들은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다. 우리 세대에서 교수라는 직업은 지금보다 더 희귀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를 바라고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은 굳은 마음 가짐 없이는 힘든 일이다.

 제조업 비즈니스가 중심인 대한민국에서 공과대학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교수가 아니더라도, 시장에서 어느 정도 수요가 있다. 굳이 유학을 나가지 않더라도, 한국 유수의 대학원들이 질 좋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국내 박사들도 취업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갖는다. 그러나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다. 사실, 한국에서 문학박사, 교육학 박사가 교수에 준하는 자리를 찾기는 어렵다. 바늘구멍만 한 기회를 꿈꾸며, 자기 인생을 놀음판에 내던지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나는 다를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도 다르지 않다. 호탕하게 나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이제 어떤 사람도 내게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평가의 순간이 필요하다. 언제든 잘못된 길에서 하산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서 배수의 진을 치기로 했다. 그 진이 허물어지는 순간, 나는 내가 지금까지 꿨던 꿈을 포기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꿨던 꿈을, 목표를 너무 한순간에 놓는다고.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결이 다르다. 내 진의 방점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다. 실패를 감싸기 위해,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꿔온 꿈이 아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결연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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