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잃어버린 매트를 찾아서

5화 보통의 하루

by 노에시스



어림잡아서 대략 백 걸음 정도. 잠에서 깨어나 택시에 타기 전의 걸음 수다. 그 뒤로 나는 동그란 네 개의 바퀴를 달고, 이백에서 많게는 사백 킬로를 넘게 달리면서 보통의 하루를 마친다.

아, 중요한 숫자를 빼먹었다. 공 다섯 개가 달린 수입금이다. 메다기에 찍힌 이 요금을 회사로 하루에 한 번씩 꼭 입금해야 했다. 아마도 매달 매년, 이 일을 계속하게 된다면 돈이 쌓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묘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


숫자로 하루를 판별하다가 보면 그 문제는 너무나 쉬워서 금세 무덤의 난제까지 풀어버린다. 인생이 뭐 이렇게 쉽다고? 나는 수학을 썩 잘하지 못한다. 고로 이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감으로는 알고 있다. 아니, 애초에 문제의 지문이 잘못된 건 아닐까. 나는 물음을 다시 고쳐 써본다. 당신의 하루가 어떠한지 설령 설명하기 어렵더라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적절한 심상을 표현해 보시오. 이렇게.


믿지 못할 수 있겠지만, 내가 잠에서 눈을 떴을 때는 한 권의 책이 헐벗은 채로 집 안을 막 날아다녔다. 내 보통의 하루에 관해서는 운을 이렇게 떼야만 하겠다. 그것은 분명히 해리포터가 다니는 호그와트 성에서 볼 수 있는 초상화, 촛불, 모자 같은 게 살아서 허공을 부유하는 장면들과 유사하다. 이걸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아마도 흔하디흔한 3인 맞벌이 가정의 아침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책은 빼곡하게 적힌 다이어리인데, 이걸 기록한 사람은 감리교단에 소속된 여자 부목사라서 여기에는 행정업무와 함께 영적인 계획들이 다소 포함되어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험한 일들이 간혹 실제 일어나면, 아내는 격양되어 내게 시도때도 없이 줄줄이 말을 이어가는데, 그럼 나는 점잖은 말투로, 신이 우리를 보고 있으니 말을 가려 하라고 그녀의 거친 호흡을 다듬어주곤 했다.


사실, 예상했겠지만 헐벗은 채로 집안 곳곳을 바쁘게 오고 가는 건 나의 아내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의 존재가 일생을 걸고 매달리는 신념과 독특한 기대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새 생명을 배에 품은 채로도 삼박 사일의 수련목회자 일정을 완수해냈다.

그러니까, 그녀는 생명이 태어남과 동시에 지는, 삼라만상의 신비 속 지금 여기에서 절대자에게 뜻을 구하고, 새벽마다 누군가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려드린다. 어쩌면 부유하는 초자연적 현상과 지독한 물성을 그녀에게 붙인 게, 나름대로 그녀의 단출함 뒤 숨어 있는 일상을 포착했다고 자부했으나, 그것마저도 무척이나 가난한 감상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뿌연 수증기와 뒤섞인 빛 덩어리다. 그것은 부유하는 다이어리와 뒤섞이기도, 툭 하고 저 멀리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무지갯빛으로 물든 작은 구름이다. 딸을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건, 아직 아이의 품성이 굳어지지 않고 개방된 상태로 수시로 변하고 있으며, 젤리와 사탕뿐 아니라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과일들의 풍미도 이제 제법 즐길 줄 알게 되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냐고 물어도, 분홍색을 고집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대답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해 버린다. 아이는 세상 모든 아름다운 색깔을 욕심내는 상태로 변한 것이었다.


특히 반짝이는 것들에 시선을 빼앗겨 버리기도 하는데, 태양 볕에 반짝거리는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기도 하는 것 같고, 어느 때는 누군가 금색 라카 스프레이로 뿌려 놓은 지저분한 돌멩이를 주머니에 전부 주워 담으려고 해서, 나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었다.


숫자로 치면 이 순간에 관한 묘사는 초 단위로 일어난 일이라서, 보통의 하루에 관한 느낌을 세세히 설명하자면 아마 이 한 편의 에세이는 성서의 두께만큼 불어날 듯싶다(이건 너무나 허풍스러운 과장이긴 하다). 그러니 이후는 설명 대신, 감각에 맡길 수밖에 없겠다.


내게 필요한 백여 발자국을 걸으려면 다이어리의 비행경로를 보고 패턴을 학습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그것의 앞을 가로막거나, 근처에 다가갈라치면 불쾌한 압박이라도 받는 듯이 파르르 하고 페이지가 무섭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나는 멈칫하다가 발이 뒤엉키고 기억도 뒤집어지곤 했다. 다시 처음의 총총걸음부터 시도하다가 보면 아이의 걸음마 연습처럼 서툰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자꾸만 걸음 수가 늘어나는 건, 집이 넓어서가 아니라 좁디좁아서 일어나는 해프닝 같은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늠름한 걸음을 걷게 되다가 보면 나는 구름을 부른다. 그 녀석은 나의 무사 귀환을 위한 기도를 옹졸한 빗방울처럼 뚝뚝 내뱉었고,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그러면 다시 다이어리가 까르르까르르하고 빠르게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분명 상기된 웃음이었다. 더 기분이 오르게 되면 페이지 넘어가면서 막 가스 불 위에서 끓는 물 주전자 소리가 나기도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떠다니는 다이어리와 구름에 홀려서 걷다가 보면 금세 나는 도로 위에 붕 뜬 채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책 페이지가 파르르 파르르 하고 넘어갈 때, 레몬트리 향내가 내 몸에 베었는데, 그것이 기억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어서, 도로를 두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아도 마치 푸른 잎사귀들이 풍성하게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고, 오래되어 잿빛처럼 변해가는 도로마저도 푸른 풀밭처럼 느껴졌다.


내가 멈출 때마다 숲의 요정들이 내 주변을 맴도는 느낌이었는데, 뒤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면서 그제야 아, 내가 택시 영업을 시작했구나, 하고 현실을 자각한 것이었다.


숨 가쁜 아침, 내 택시에 탄 여성 손님들은 화장을 고치고 어딘가로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내가 제아무리 편안하고 부드러운 운전을 한다고 해도, 방지턱을 넘고 차선을 바꾸고 회전하면 덜컹거림이 생기기 일쑤인데, 그들은 능숙하게 파도를 타는 서핑선수처럼 화장했다.


다만, 빨간불 신호에 걸리면 파운데이션을 터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다다닥다다닥. 내 귓가에 조촐하게 울리는 북소리처럼 들렸는데, 나는 다시 분칠하는 리듬에 홀려 몽상에 잠기게 되었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내 택시 안을 맴도는 상상을 한 것이었다. 어느 과학자가 잠자리야말로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진화가 잘된 생명체라고 했는데, 여성이야말로 모든 남성의 기원이었고, 어미라는 저 먼 고향으로 우리를 깊은 유대로 묶어 왔으며, 대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였다—같은 생각에 잠기다가 신호가 켜져서 나는 다시 앞으로 나갔다. 아내가 잠자리를 참 잘 잡는데.


다음 손님으로 내 택시에는 초록색 계열의 두툼한 점퍼를 입은 젊은 남성이 탔다. 폴리에스터 재질의 잠바에서는 손님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택시 안을 채운 것이었다. 소리의 근원지에 끌려서 무심코 백미러를 살폈는데, 아니, 나는 왜 거대한 여치를 떠올리고 있는 것인가.

보호색으로 풀잎 속에 은신하고 있다가, 종종 깡충거리는 충동을 못 이겨 흑색 바위에 발각되는 여치 같았던 건가. 공원 풀밭에서 우리가 함께 자유롭게 자연 속을 노니며 만끽할 때였다. 딸이 한 움큼 풀을 뜯어 온 줄 알았는데, 거대한 여치를 잡아 왔던 거다. 와. 겁도 없는 녀석.


“여기서 내려드릴까요?”


“감사합니다. 기사님.”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내는 말했어. 우아, 여왕 여치인가 보다. 나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는데, 아이는 깜짝 놀라 하며 큼지막한 여치를 내던졌다. 너무 꽉 잡아서 그런지, 그 녀석이 내 딸의 손바닥을 꽉 물고 도망쳐버렸다. 손에는 오줌 같은 진물 같은 게 남았다. 작은 얼굴에 배신감 같은 감정이 서려 있던 게 참 신기했었는데.


생명은 환상일까.


인간은 매일 밥을 짓고 이불을 펴는 반복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 의미들은 때로 공포와 절망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희망이나 애틋한 기대가 되어 돌아온다. 바람처럼, 곧 삶에 깃들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과 함께.


정오의 태양이 강렬하고 뜨거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기억의 찰나에, 쉿, 곤히 잠든 아이의 숨소리처럼 일상의 단출한 것들이 조용히 밀려 들어와, 그 모든 해묵은 물음은 금빛 속에서 새카맣게 지워졌다.


택시 영업을 마친 나는 주차장에 차를 알맞게 넣고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초원을 힘껏 뛰놀다 온 것처럼 근육이 죄다 풀려버려서 몸이 흐느적거렸다. 겉옷에는 상긋한 냄새를 풍기는 풀잎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나는 그대로 바람결에 몸이 붕 떠서 다시 집 구멍으로 잘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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