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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Aug 27. 2021

필경사 바틀비

바틀비의 생존방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필경사라는 우리나라 절을 방문한 외국인 바틀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제목부터 입에 붙지 않고 낯설었다. 바틀비, 그의 존재처럼 말이다. ‘필경사’는 글씨를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1853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책의 화자인 변호사 ‘나’는 법률서류를 옮겨 적는 필경사들과 일한다.


   바틀비 그는 누구일까. 건물로 빽빽한 윌스트리트 소재의 사무실, 사방은 옆 건물의 벽만 보여 삭막함을 더한다. 일이 많아져 추가 인력이 필요한 사무실에 어느 날 바틀비가 필경사로 일하게 된다. 그의 등장은 창백하리만큼 말쑥하고 가련하리만큼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모습이다.

 

  화자인 변호사 ‘나’, 고용되어 일하는 필경사 터키, 니퍼스, 심부름 소년 진저 너트는 바틀비가 누구인지 묘사하기 위한 인물보였다. 큰 야심이 없이 타협적이고 평화주의자인 변호사 “나”는 그의 고용인이다. 사무실 직원인 터키는 낮 12시를 기점으로 더욱 얼굴이 붉어지고 실수가 잦으며, 니퍼스는 일은 깔끔하게 처리하지만 신경질이다. 특히 오전에 말이다. 어느 날 나타나 ‘안 하는 편을 택’하는 바틀비는 그들에게 비추어져야 어떤 사람인지 뿌엿하게나마 추측된다. 책은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의 필사를 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p27)    


  바틀비는 고용주가 요구하는 의례적인 일들, 예를 들면 필사한 문서의 대조 확인, 자잘한 심부름 등을 “안 하는 편을 택”하며 거절한다. 그의 거절은 수동 공격적이다. 거절아닌 거절을 하며 타인을 곤란하게 한다. 어느 순간부터 바틀비는 자신의 일인 필사조차 하지않으 사무실에서 기거하고 있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 모습은 당황스럽고 화가 나지만 바틀비에 대한 감정은 이를 넘어선다. 당황스럽고 불쾌한 그를 어쩐지 떨칠 수 없다.    


  고용인의 요구에 아무 생각 없는 듯 태연하게 답하는 바틀비의 모습이 어딘가 인간다운 데가 있었다면 난폭하게 사무실에서 쫓아냈을 것이라 한다. 그의 모습은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도 없다.  '나'는 그에게 여러 제안을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택하는 바틀비를 두고 결국 사무실을 이전한다. 그곳에 남은 혹은 남겨진 바틀비는 출몰하는 유령처럼 건물 여기저기에 나타나며 생활한다. 이 모습에 격노한 건물주와 다른 세입자들은 민원을 제기하고 그로인해 바틀비는 구치소로 가게 된다.     


  바틀비는 우연히 발에 걸려 딸려가는 젖은 무거운 솜이불 같다. 책의 화자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그렇다. 대체 왜 저러는지, 친절하지도 쉽지도 않게 써놓은 글을 읽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우리를 뒤흔든다. 그의 존재는 당황스럽고 낯설지만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나’는 떨쳐낼 수 없는 바틀비를 만나러 구치소로 찾아가고 그곳에서도 바틀비는 여전히 ‘안 하는 편을 택’하며 바짝 말려져 바스러지는 종이처럼 그렇게 생(生)을 마감한다.


   바틀비는 홀연히 나타나 아무것도 안 하는 편을 택하며 우리를 뒤흔들고 홀연히 사라진다.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두 페이지는 이전 바틀비에 대한 소문을 전한다. 그는 워싱턴 사서(死書) 우편물계의 하급 직원이었는데 어떤 변경에 의해 갑자기 해고 당한다. 사서란 배달 불능한 ‘죽은 편지’로 반송도, 어느 쪽으로도 갈 곳 없는 편지이다. 그는 그런 편지를 분류해 불태우는 일했다고 한다.    


“날 때부터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 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p93)    

  

 책을 덮으며 옮긴이의 말에 도움을 받아 [필경사 바틀비]를 썼을 당시, 작가의 삶을 그린다.     


『농가의 작은 서재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그는 소설가이다. 큰 체격은 아니지만 다부진 몸집에 얼굴이 불그스레하며 머리가 길고 수염을 덥수룩하다. 심혈을 기울여 쓴 장편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고 팔리지 않고 출판사에 재고로 쌓여있는 책들은 그마저도 화재로 재가 되었다. 소설 한 편을 더 발표하였지만 결과를 더욱 참담했다. 남자는 한 월간지에 헐값에 글을 팔기로 하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글을 쓰다 말고 연신 창밖을 내다본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네 살 먹은 아들은 밖에서 혼자 놀고 아내는 겨울 준비에 여념이 없다. 농장은 장인에게서 빌려 마련한 것이다. 생계를 꾸릴 일이 막막하다.』    

  도망갈 곳 없는 곳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져야 하는 삶 속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한’ 바틀비의 생(生)을 위한 그만의 손짓이 아니었을까? 살아내야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모두의 바틀비를 동정하고 연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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