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밍꼬 Jun 11. 2021

그 차의 사정, 굿바이 레디

안녕? 난 빨간 차 레디야. 나의 이야기 한번 들려줄까?

    레디 : 6살 된 빨간 자동차잘 빠진 몸매에 빨간 옷을 입고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다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에 자화자찬이 취미임실제로 적게 먹고 많이 달릴 수 있는 능력자다이번 가족과 산 지는 3년 차 그러나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그동안의 추억을 기억하며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외모와 속도를 뽐내며 달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안녕 나야 나, 레디. 다들 나 알지? 나를 모르면 왕곡동 사람이 아니지. 이 좁은 동네에 나처럼 눈에 띄는 자동차는 몇 없거든. 내가 이곳에 살게 된 지 벌써 3년째야, 근데 이번에는 진짜 이곳을 떠날 거 같더라고. 언제부터 나를 보낸다고 계속 말하더니 이번에는 진짜인가 봐. 레디퀸이라는 몸집 큰 녀석이 온다나? 어디로 갈지는 몰라. 그래서 떠나기 전에 내 얘기를 들려주려고 해. 내 얘기 한번 들어봐.

 

   나는 2019년 더운 여름 이곳에 오게 되었어. 주차장 같은 곳에 한참 서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남자와 아기를 안은 여자가 오더니 내가 마음에 든다고 고민 없이 나를 데려가더라고. 내 외모와 몸 상태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 선택이었지. 그 여자가 나를 운전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멋진 나를 운전하게 되어서 꽤 신나 보였어. 나의 주인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결혼도 하고 애도 있으니 아줌마 같은데, 아줌마라고 하면 화를 낼 거 같아. 그렇다고 주인님이라고 부르기도 웃기고. 그런 호칭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어차피 못 들을 거 그냥 아줌마라고 하지 뭐.      

  나는 새로운 집에 도착해서 뒷좌석에 세 개의 보조 의자를 달았어. 이름이 카시트래. 그런 건 처음이라. 대체 누구를 태우고 다니게 될 건지 긴장되더라고. 다음 날 나는 그 정체를 알았지. 말하는 여자아이 둘과 말 못 하는 작은 남자아이 하나가 내 뒷자리에 쪼르르 앉았어. 많이 시끄럽더라고! 나를 탈 때 ‘으쌰’ 하며 기어올라야 할 만큼 작은 사람들인데 나를 만나니 신나 보였어. 그중 가장 커 보이는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빨간색은 RED라며 나한테 ‘레디’란 이름을 붙여주었어. 그래서 내가 레디가 된 거야. 평범하지만 익숙해지니 부르기 좋고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 


  주인 여자는 뭐랄까. 나를 운전하는 게 서투르진 않은데 겁이 많았어. 더구나 말 못 하는 남자아이가 카시트에 매달려 울거나 두 여자아이가 시끄럽게 떠들면 정신없어하며 겁을 냈어. 그런데 차에 탄 네 사람이 그럴 때면 나야말로 정말 겁이 났어. 웬만한 일에 겁을 내지 않는 나인데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뜨거운 해가 기운 여름 오후였지. 내가 온 지 일주일이 안 된 날이었어. 아줌마는 아이들을 태우고 동네 밖으로 나왔어. 그날따라 아줌마의 표정은 더 긴장되고 애들은 유독 더 떠들었지. 아줌마는 신나서 노래를 부르는 애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어. 나는 자주 가는 마트를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지. 큰 아이의 미술 수업이 있어서 주민 센터에 간다고 했는데 주차장에 들어가려면 건물 뒤로 가야 했나 봐. 좁은 길로 들어온 내 뒤로 다른 차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어. 그 때문에 마음이 급했는지 주인아줌마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서둘러 오른쪽으로 돌려 버렸거든. 근데 이...이건 아니지. 이런 내 옆구리!!      


“쿵 드르륵!! ”     


  오 마이 갓!! 주차장 입구 기둥에 예쁜 내 빨간색 옆구리가 긁히겠는구나 했는데 이게 웬걸 내가 주차장 벽을 타고 올라가 버린 거 있지? 맙소사,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대로 굳어버렸지 뭐야? 주인아줌마는 ‘이걸 어떻게 이걸 어쩌지’ 하며 안전벨트에 매달려 몸이 기울여진 채 나를 다시 땅에 내려보려고 이것저것 만지며 원래대로 되돌려보려고 했어.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지. 포기한 아줌마가 119에 연락해야 하나 어디로 연락할지 당황하는 동안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왔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어. 아줌마는 벌벌 떨며 고맙다고 뒤에 아이들이 타고 있다며 도와달라고 했어. 문을 연 사람들은 ‘어머 뒤에 쪼그만 애들이 셋이나 타고 있다’며 벽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나를 본 것보다 더 놀라더라고.


  다행히 곧 아줌마 남편도 왔고 견인차도 와서 나를 무사히 벽에서 내려 주었어. 나는 정비소로 가게 되었지. 이 사고로 내 몸통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자동차 밑창도 뜯겼지만 정비소에 며칠 있다가 나오니 멀쩡해졌지 뭐야. 오랜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비하니 몸이 개운해졌어. 이 사람들이야 내가 어찌나 재주 좋게 지켜줬는지 털끝 하나 안 다쳤고 말이야. 그리고 내 밑창과 옆구리가 뜯기고 주차 차단기까지 망가졌어도 딱 보험금이 더 올라가지 않을 만큼만 사고 견적이 나오더라고. 이거라도 주인아줌마한테 위로가 되었길 바래. 

  근데 주인아줌마는 충격이 많이 컸나 봐. 아줌마 남편은 사고는 원래 나는 거고 아무도 안 다쳤으면 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줬는데도 귀에는 들리지 않았나 봐. 아줌마는 자기는 운전할 자격이 없다며 계속 우울해했어. 아니 다친 건 내가 다쳤는데 자기가 왜 그런데? 그때 여섯 살 된 첫째 아이가 아줌마를 보고 고백할 게 있다며 말했어.     


“엄마 사실 난 사고가 나서 좋았던 게 있어. 그건 바로 자동차 바닥을 볼 수 있었거든. 자동차 배가 하늘로 들어 올려졌는데 그 밑에 전선들이 이렇게 막 엉켜있더라고.” 


  나 참 웃겨서 아줌마도 그때야 웃더라고. 나는 이렇게 오자마자 왕곡동 하늘에 내 배를 보여주게 되었어. 지금은 차에 타기만 하면 내 운전석 등짝을 더러운 운동화로 마구 발길질하는 그 녀석, 그때는 카시트에 묶여서 말도 못 하고 눈만 껌뻑였는데 참 많이 컸어.



  이게 왕곡동에서 가장 큰 일이었나 봐. 그 뒤로는 평범한 날들이었어. 아침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갔어. 주말에는 가끔 찌뿌둥한 내 몸을 풀어 주겠다고 근처 호수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 날에는 나도 콧바람이 났지. 대부분 조용하고 몸이 근질근질한 날들이었어. 이곳에서는 나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동네만 어슬렁거렸거든. 사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적게 먹고 빠르게 씽씽 달리는 거야. 그런데 이 동네에서는 빠르게 달릴 일이 없어. 길도 좁고 아이들이 많아서 항상 느린 속도로 달려야 한데. 전에는 가끔은 신호등이 없는 고속도로를 쌩 달려 애들 할머니네도 가고 아줌마 친구를 만나러 가기도 했어. 100킬로쯤 속도로 달리는 그런 날이면 엔진에 낀 묵은 때가 싹 청소되어 어찌나 개운하던지. 근데 최근에는 1년 넘게 그럴 일도 없었지. 코로나19라나? 사람들이 안 돌아다녀. 매일매일 신발에 흙을 묻혀 나를 타던 아이들도 집에 있는 날이 많았어. 오죽하면 가끔은 내가 고장 날까 봐 시동만 겨우 틀어 주는 날도 있었어. 새로운 주인을 만나면 타이어가 닳아 없어지도록 쌩쌩 달려보고 싶어. 브레이크만 빡빡 밟아 타이어가 닳는 거 말고. 그런 날을 기대하면 시끌벅적한 이 집을 떠나는 일도 기대가 되네.


   3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이 동네를 잘 모르겠어.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아파트 단지에 큰 마트도 있는 도시인데 우리 집은 산도 보이고 물도 있고 조용하거든. 시끄러운 애들은 낮에는 어딜 갔다 오는지 매일 신발에 풀이며 흙을 잔뜩 묻혀 와. 비 오는 날에는 그 발에 진흙을 묻혀오는데... 아휴 말도 마. 처음에는 흙이며 풀이 내 몸에 떨어지는 걸 기겁했는데 이제는 지푸라기 한 다발은 항상 내 시트에 놓여있어. 그뿐이야? 운전석이며 보조석이며 내 등을 흙 묻은 발로 차대는데 통에 발자국 모양이 원래 무늬인 줄 알겠다니까. 주인아줌마도 처음에는 조심해라 발 털어야지 하더니 이제 포기하더라고. 내가 봐도 매일 있는 일이라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야. 너그러운 내가 참아야지. 그래도 양심상 목욕은 좀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하지만 이제는 그냥 그렇구나 해, 좀 지저분하다고 타고난 내 외모가 어디 가겠어?

 

  최근에는 첫째 아이가 어디를 가게 되면서 하루에 두 번만 움직이던 내 스케줄이 바뀌더라고. 더 일찍 나와서 오래 움직이고, 아침, 점심 또 늦은 오후에 한번 더 움직여. 그래서 전보다 배가 빨리 고파져. 아줌마는 아침에 첫째 아이를 시끌벅적한 학교라는 곳에 내려 주고 다시 차를 돌려 항상 가던 나무와 시냇물이 흐르는 주차장으로 가. 주인아줌마는 그곳에 나를 세워두고 둘째 아이와 손을 잡고 내렸다 잠시 뒤에 혼자 돌아와. 그럴 때면 아줌마는 잔디밭에 서서 기지개를 쭉 켜며 하늘을 한번 쳐다봐. 그래 그렇게라도 하늘을 보라고. 그땐 정신없던 내 마음도 함께 차분해지는 거 같아.


   또 변화가 있었어. 추운 겨울이 지나자 쪼그마한 무언가 하나 더 나타났어. 그 때문에 아이들이 차에 앉던 자리가 바뀌었어. 늘 비어 있던 보조석에는 내 배를 보게 돼서 좋았다는 첫째 아이가 앉고, 빨간 아기용 카시트에는 빽빽 울어대는 엄청 작은 새로운 아이가 앉았어. 귀여운데 얘도 시끄럽더라고. 애들이 한자리씩 밀려났어. 그래서 이제 더 큰 차가 필요한가 봐. 어떤 녀석이 오게 될지는 몰라도 내 몫을 해내려면 꽤 애써야 할 거야. 가끔 내 옆에 세워져 있던 파란 니로로 녀석은 이 집에 남아 나 대신 주인아줌마의 차가 될 거래. 이 시끄러운 녀석들이랑 같이 지내려면 앞으로도 고생길이 훤하다. 너에게 응원을 보낸다. 니로로     


  신나도 슬퍼도 나를 발로 차고.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며 소리 지르는 건 기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라이트를 컸다 껐다, 이건 뭐냐고 물으며 주유구를 열었다 닫는 날 만지는 꼬물거리던 손이 기억날 거야. 귀찮게 굴긴 해도 나를 레디라고 부르며 좋아했거든. 내가 처음 왔을 땐 다들 너무 작아서 나를 기어오르듯 탔는데 이제 혼자 안전 벨트도 하고 차 문도 열고 하네. 꼬맹이들 많이 컸다. 주인아줌마도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을 날이 올 거야. 나보다 큰 차를 몰게 되었다고 겁내지 말고 차가 다 똑같지. 아줌마는 겁이 많으니 항상 무리하게 욕심내며 다니지 말고 조심해!

   아 그리고 동생들 사이에 끼어서 어깨 굽히고 앉았던 그 목소리 큰 여자애한테는 새로운 차에선 가장 마음에 드는 자리를 먼저 고르라고 해줘. 그동안 좁은 차에서 고생 많았다고. 그 차는 의자들이 다 떨어져 있다니 서로 자기 자리 넘어오지 말라고 싸울 일은 없겠지.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 정말 시끄러워.


   나 정도 외모와 실력이면 누구든 나를 마음에 들어 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면 나를 씽씽 달리게 해주고 자주 씻겨주는 주인을 만나면 좋겠어.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쌩쌩 달리다 마주치게 되면 인사할게. 그럼 잘 있어

이밍꼬, 우리집 세컨카 레디를 보내며 전하는 이야기.


이밍꼬, 우리집 세컨카 레디를 보내며 


이밍꼬, 우리집 세컨차 레디를 보내며 전하는 이야기


전하는 이야기.

이전 06화 초보운전 다둥이 엄마의 첫 사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