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책읽기가 나에게 선물해 준 소중한 느림의 시간
아직 올망졸망한 네 아이 엄마의 하루는 참 바쁘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정신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둘째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아이는 바쁜 내 일상에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둘째 이파리는 찬바람이 시작하는 계절에 작고 작게 태어났다. 가뜩이나 작은 아이가 늦은 가을에 태어나 봄 여름 생 친구들을 따라 크느라 바쁘게도 자랐다. 언제 크나 했던 아이가 벌써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더 늦기 전에 한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체구도 작은 아이가 글까지 모르면 뒤처지게 될까 또 걱정됐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라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면 서로 안아달라고 달려드는 산봉우리와 들판이를 제치고 일곱 살 이파리가 나의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다.
저녁마다 시간을 내서 이파리와 한글 읽기를 시작했다. 아이는 머릿속에 ㄱㄴㄷ을 꾹꾹 넣어가며 글을 익혔다. 어느 정도 글자를 읽게 된 후로는 아이가 책을 골라 와서 나와 한 쪽씩 번갈아 가며 읽는 게 요즘 일과였다. 아직 읽는 게 서툴고 어려운 아이가 책을 고르는 모습은 참 재미있다. 재밌으면서 읽기 쉬운 책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책장 앞에서 한참 고심하며 책들을 꺼냈다 꼽았다 하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이의 속이 뻔히 보여 웃음이 난다. 평소에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거리며 입은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는 책장 앞에서는 세상 제일 고심스러운 사람이 된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디 얼마나 잘 고르나 보자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선택을 기다린다. 언니처럼 술술 읽고 싶은데 아직은 너무 어렵다. 글자가 적은 책을 고르면 너무 쉬운 책을 가져온 게 아니냐는 엄마의 타박이 이어질 테니 '오늘의 책 선택'은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이파리는 한참 고민 끝에 책을 골라서 나와 나란히 누웠다. 펼친 첫 장에 글씨가 많다.
“뭐야~ 뭐가 이렇게 많아.”
그래도 이파리는 큰 숨을 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습.”
한 글자씩 어찌나 또박이며 읽는 지 귀를 기울이다가 잠시 딴청을 피우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다. 아이가 내뱉는 발음과 속도가 답답해서 얼른 내가 읽어주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차오른다. 양치도 시켜야 하고 애들도 재워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나는 열심히 듣는 척을 하다 정신이 멍해지며 잠이 솔솔 몰려 왔다.
“뭐야 엄마 자는 거야?”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지친 몸이 아이의 목소리를 자장가가 삼아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귀가 쨍한 이파리의 목소리에 아니라고 말하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함께 책에 집중한다.
한글에 익숙하지 못한 아이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 아이의 속도에 맞춰 나의 시간도 함께 느릿해진다. 읽어 내리는 한쪽에 머무는 시간 많으니 내가 후르륵 책장을 넘기며 읽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인다. 땅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올린 불그스레한 고슴도치 얼굴, 구석진 데에 핀 한 송이 꽃, 나무에 달린 작은 매미. 흐리게 떠오르는 태양. 솔방울 때부터 수십 번을 더 읽었던 책인데 처음 발견한 것들이다. 천천히 오래 바라보니 그림책 한쪽이 담아낸 모습이 아름답다.
매일 힘들다 바쁘다 투덜거리던 나의 하루도 천천히 바라보면 이렇지 않을까? 느리고 어수룩한 아이의 책 읽기가 선물해 준 시간에서 나는 느릿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아이가 나에게 선물해 준 소중하고 느릿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