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결국엔 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몇 년간 학교 상담자로 일했습니다. 열심히 배워 상담심리전문가로 나를 펼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날개를 숨기고 네 아이를 키우며 삽니다. 두꺼운 전공서로 달달 외우던 심리학 이론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야 비로소 몸으로 체득합니다.
서울에서 두 아이를 낳고 살다 우연히 들린 의왕 어느 마을에 반해 이사를 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매일 새로움을 찾아 헤매던 나는 이제는 밤 9시면 불이 꺼져 깜깜해진 마을에 7년째 살고 있습니다. 전업주부는 되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치던 내 마음은 포기와 적응 사이에서 날개를 접었고 그저 무탈한 하루를 마치는 밤이면 평범한 매일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 낳고 키울수록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오히려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해 아이들에게 남은 ‘ 작은 틈’은 아이들과 나를 스스로 성장시켰습니다. 지금도 네 명의 아이들에게 모든 걸 다 해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 더 해내려고 노력하는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로 살아가려 합니다.
뻔한 일상을 치르듯이 살아온 나의 매일이 10년 동안 모였다. 십 년간 매일이 모이자 내가 달라졌다. 낯설고 새로운 일을 하려면 겁을 먼저 먹는 나였는데 마음에 단단한 근육이 생긴 것 같았다. 아이만 키우며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며 살다 보니 그 마음이 모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섬세하게 ‘무엇이든 하고 싶다’와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였다. 무언가 간절했다. 제한된 시간 내 공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당장 실천하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자 밋밋하던 내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함께 글을 나누는 벗이 생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은 내 삶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다른 삶을 배우게 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인터넷에 글을 나누는 브런치 작가 도전하였고 누군가는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지겹도록 평범한 일상을 글로 적어 보니 모범생으로 손꼽히던 학생 시절에도 못 해보던 몇몇 공모전에 글도 당선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가 글로 남았고 티끌 같은 글은 모여 뭉쳐 알맹이가 되었고 ‘내 것’이 되었다.
물러설 곳 없이 가족을 돌보는 내 일상.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모든 하루들은 보이지 않는 나의 작은 성취였다. 성취인지 몰랐지만 나는 성실히 매일을 모았고 그로 인해 단단해진 나를 발견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남편의 말을. 불안 잠식되어 걱정만 하고 움직이지 않던 나의 이십 대보다, 지겨운 하루를 피하지 않고 일구며 살아온 서른 아홉의 나. 나는 이제야 단단해진 모습의 나를 만나 자신감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