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없는 계절의 말

by 이경

당신께 편지를 쓴 지 꽤 오래 지났습니다. 두 해를 훌쩍 넘기도록 한 번을 쓰지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이 말이 가당치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여 더욱 미안합니다. 당신은 저를 기다리지 않았을 터인데요. 혹은 그럼 그렇지 하고 쉽게 잊었다 생각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그럴리는 없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장담할 수 없는 그 어느 때까지 차마 놓지 못할 겁니다.


오늘은 집에 돌아오며 능소화가 피고 진 자리를 부러 지나쳤습니다. 그 꽃들이 참 예뻤다고 생각하면서요. 초여름 어느 날 여느 담벼락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능소화를 저는 좋아합니다. 이국의 섬, 짙은 초록잎이 가득한 정글에서 필 것 같은 환한 주홍빛과 매끈한 질감 그리고 활짝 펼쳐진 꽃잎과 가냘픈 꽃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자주 눈길을 빼앗기곤 하지요.


그러나 능소화의 꽃말이 다소 처연한 것을 아시나요. 기다림, 그리움, 명예입니다. 왕을 향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시름시름 앓다 죽은 궁녀가 묻힌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는 설화도 있습니다. 누가 남겼는지 모를 이야기 속에서 능소화는 담을 타고 넘어가 망울망울 피어날 만큼 님을 그리워했으면서도 끝내는 송이째 떨어지고 스러져 사랑하는 마음을 꺾지 않는 존재로 환히 피어있습니다. 이야기를 남긴 이는 분명 붉은 마음이 희끗해지도록 오래 품어본 사람이겠지요.


요즘은 제가 정말로 그래본 사람인지 자주 의심합니다. 빨갛게 뜨거워진 마음을 마구 꺼내 보다 데인 상처까지 주고받았던 오래 전의 첫 연애는 이제 남의 얘기 같고 그 이후의 지난했던 짧은 연애에서 남은 것은 기뻐하기도 전에 허물어지고 이지러지던 마음뿐이었습니다. 얕은 호감은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앉은 이 없이 움푹 들어간 자리만 남겼지요. 이제 저는 꽃이 피는 담벼락 아래에서 고요히 굳어가는 돌멩이와 같다고 느낍니다.


다만 가끔은 돌멩이의 마음으로도 꽃을 삽니다. 능소화와 꼭 닮은 산호색 튤립과 엄지손톱만 한 꽃망울이 모여있는 연분홍색 장미를, 연둣빛 잎이 잔뜩 붙은 알스트로메리아 같은 것을 사서 차가운 물을 채운 유리병 안에 넣어두지요. 사람이 참 어려워서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기조차 두려운 날에 그렇습니다. 한껏 연약하고 환한 꽃들을 집으로 데려오면 움직이지 않는 눈으로 쳐다봅니다.


다음 여름에도 능소화가 한가득 핀 덩굴 아래를 지날 터입니다. 저는 그때의 제가 계절보다 훨씬 더 뜨겁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남겨두는 일이 부끄럽기도 하네요. 그러나 거짓 없는 한 줄입니다. 한 줄의 마음으로 저는 능소화가 없는 계절을 애써 날 수 있을 겁니다.





블라인드 레터[Blind letter] : 수취인 불명의 편지. 모두에게 아무도 아닌 이에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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