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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Sep 24. 2023

귀엽고 지겹고 사랑하는

연애에 대한 편지, 이경

    유희 씨, 잘 지내시나요? 저는 요즘 다친 엄마를 보살피러 병원에서 얼마간을 지내다가 퇴원 후 부모님 댁에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엄마와 꼭 붙어 생활하는 동안 안쓰럽고 답답해서 화를 내고 울다가도 엄마가 좋아할 만한 코미디 영화와 드라마를 골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상을 차려 같이 밥을 먹으며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고 떠들기도 합니다. 진득한 생활입니다.


    나이가 들어 고집스러워진 엄마와 예민한 딸이 하루종일, 매일같이 좋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당혹스러워지거나 너무 지긋지긋해서 인상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가도 홈쇼핑으로 예쁜 옷을 구경하고 친구들과의 일을 이야기할 때 좋고 싫음을 또렷하게 표현하는 엄마가 귀엽고 좋아서 웃습니다.


    귀엽고 지겹고 못내 사랑하는 사람. 물론 가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저는 연애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좋을 때는 먹는 것도 사랑스러운데 싸울 때는 숨소리에도 진저리 치게 피곤해했습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세상살이에서 가장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요. 그이를 미워했다가, 제가 화내는 이유가 온당한지 의심하다가, 상처 난 순간을 곱씹다가, 결국에는 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감춘 채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는 처지가 괴로워서 자꾸 눈물이 났었습니다.


    저는 한때 연애가 사랑과 동의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어떤 상태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정도와 형태에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혼란스러워했지요. 결국 길고 짧았던 그 시절을 지나면서 남은 것은 몇 가지 아름다운 장면과 그 장면을 파묻을 만큼 잔뜩 쌓인 상처입니다. 오후의 봄볕이 스며들어 있던 창덕궁과 공기가 맑아 더 밝게 빛나던 크리스마스의 서울 야경 위로 표정과 목소리들이 먼지처럼, 눈처럼 가득합니다. 슬로 모션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굳어지는 얼굴, 잔뜩 치켜 올라간 눈썹과 이글거리며 쏘아보는 눈빛, 아무런 뜻도 없이 체념한 눈동자와 같은 것들입니다. 초겨울 비처럼 차갑고 축축한 목소리도 있고, 커다란 산불처럼 크고 성난 목소리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받은 것과 준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지요.      


    그래도 연애가 끝난 후에는 가급적 빠르게 벗어나려고 하는 편이었습니다. 마음이 짓뭉개지면 추스르느라 펼쳐 놓는 대신 누가 볼까 일단 덮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저는 이성적이고 강인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감정이 이성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너무 많은 애를 쓰고 탈진하다 결국 이상한 곳에서 흐트러집니다. 쉬 끊이지 않는 이 과정이 얼마나 쩨쩨하고 끔찍한지 모릅니다.      


    물론 이 말이 연애 자체가 끔찍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연애가 시작되려고 할 때 저는 끊임없이 상상을 하는 편입니다. 상상속에서 저는 그이와 함께 뜨거운 불에 고기를 구워 먹거나 싱싱한 회를 올린 초밥을 먹습니다. 양념이 듬뿍 밴 떡볶이, 나물 무침이 가득한 백반까지 사실 무엇이든 좋지요. 세련된 디자인의 카페에 앉아 방금 내린 커피를 한 잔씩 마시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한적한 공원을 손잡고 걷습니다. 우뚝 솟은 나무들이 이룬 작은 숲 속 길을, 너른 잔디밭과 호수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부여잡은 온기를 느낍니다.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옷 너머의 살결을 떠올리고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한쪽부터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유희 씨도 아시겠지만 지난해 여름 저는 이 과정을 다 거쳐 또 한 차례의 짧은 연애를 끝냈습니다. 희뿌연 마음으로 한동안 일을 하고 웃고 떠들다 가끔 술을 마시며 보냈지요. 금세 괜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확신은 못합니다. 저는 또 누구를 만나서 이 과정을 겪게 될까요? 그동안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될까요? 아니면 이런 이야기를 지금보다 더 멀리 떠나보내고 초연해지게 될까요? 아무도 모를 질문들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희뿌옇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은 마세요. 머릿속을 채운 것들을 편지에 자꾸 적다 보면 조금은 나아서 잘 지내냐고 묻고 잘 지내야지,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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