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3 낯선 일
일상, 사전적 의미로는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할 것이라는 말이다.
누군가는 매일매일 하루 단위로 돌아가는 쳇바퀴로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안정적이고 큰 변화 없는 삶의 축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일상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평온하고 안전한 날이 매일매일 반복된다는 말이다.
나 또한 일상을 아주 좋아한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도로, 익숙한 사람, 익숙한 냄새, 익숙한 맛은 언제나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부모님 같다.
변하지 않고 항상 마을 입구를 지키는 장승처럼 곁의 누군가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대로일 거라는 믿음은 정신을 견고하도록 돕고 마음을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작동한다.
나는 유 경력의 오래되고 지독한 프로 집착러이다.
한 번 마음에 든 음악은 질릴 때까지 들으며 좋아하는 음식은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어 질 때까지 먹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 좁고 깊은 소셜 네트워크를 지향하며, 양보다 질을 추구한다.
여럿이 모여 놀아도 좋지만, 2~3인 정도 소인원의 단짝 친구만 있어도 삶에 무리가 없다.
살면서 자기 자신을 오롯이 알기도 어려운데 남을 잘 알기란 더 어렵다.
주변에 단짝 친구 2~3인이 있다면 그들의 성격, 취향, 인생사, 주변사, 삶의 목적만 같이 탐색해 보더라도 족히 1인당 10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누군가를 오롯이 이해하고 삶을 발맞춰 가려고 공들이며 애정을 인정사정없이 난사하다 보면 어느덧 머리가 희끗한 노년을 맞을 것이다.
가뜩이나 80밖에 안되는 짧은 인생, 귀중한 시간을 가장 소중한 인연에 할애하고 싶은 집착이다.
그만큼 내게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인간관계만큼 좋은 관계가 없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기분을 알아채는 관계란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환상적인가.
일상에 푹 절어 풍경처럼 한 페이지가 된 관계는 견고한 신뢰 위에 쌓은 튼튼한 성이다.
이미 알고 있는 안정감의 맛은 언제 먹어도 맛있는 라면처럼 안락하고 중독적이다.
남자들 최대 이상형이 처음 보는 예쁜 여자라고 한다.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래된 고전처럼 클리셰, 범벅의 이미 알고 있는 맛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모르는 것이다.
남성에게 제육과 돈가스가, 여성에게 떡볶이와 빵이 있듯, 늘 알고 있지만 늘 맛있는 그 맛이 바로 익숙한 관계의 뻔한 맛이다.
오죽하면 로맨스 소설 클리셰 중 스테디셀러가 ‘익숙해서 당연히 항상 내 곁에 있는 줄 알았다.’가 존재하겠는가.
넷*릭*나 티* 같은 OTT 서비스를 자주 본다.
원래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최근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적적함을 이겨내고자 이용한다.
흡사 빈둥대며 가장 바쁜 시간대의 카페에 앉아 엿듣는 옆 테이블의 생동하는 실제 드라마의 유사 버전과 같다.
바람난 애인과 꽉 막힌 팀장님, 불손한 거래처 사장님과 무능력한 사장님 등 듣다 보면 실제 드라마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가 즐비하다.
어떨 땐 OTT 서비스보다 사람 꽉 찬 카페가 드라마틱하다.
최근 외출이 줄어들면서 카페 이용이 크게 줄어 심심하던 차에 OTT 서비스로 전향한 것이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했듯 나는 일상과 익숙함을 찬양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항상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애초에 사건, 사고가 없으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기면 심각할 일을 많이 다룬다.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타인에 의해 잃거나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쟁이 나거나 희대의 살인마가 나타나거나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외계인이 침공하거나 급작스럽게 병에 걸리거나 사회가 모두 함께 종말로 치닫는 등 상상치도 못한 각종 방법으로 사건이 생긴다.
전엔 판타지나 SF 등 100% 상상과 허구로 만든 이야기라 그저 즐기면 그만이었지만 요즘엔 현실에서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이야기가 더 많다.
특히 보고 난 후에 한참 동안 충격에 빠진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테이큰이었다.
주인공인 아버지 역이 비현실적이어서 즐겁게 봤지만, 딸이 납치당하는 장면은 영화 보고 집에 가다 어디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후로 추격자처럼 온갖 범죄 고발 격의 영화들이 쏟아지면서 각종 도시 괴담을 유발했다.
인육 거래, 마약, 청부살인, 조폭, 스토킹, 인터넷 범죄, 사기, 연쇄살인, 사이코패스 등 유행을 갱신하듯 새로운 범죄 유형을 이어갔다.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며 방송 매체의 많은 프로그램이 유행한 유형의 범죄를 다루고 나면 유튜버 같은 소형 매체에서 또 다룬다.
사회에 메들리처럼 반복해서 험악한 단어가 오간다.
한동안 일상의 행복이나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방법을 기술한 콘텐츠가 유행했다.
일본발 작은 행복 누리기 콘텐츠의 시작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지친 일본 내 사토리 세대의 영향이었다.
한국 내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가 과열되자 욕심내며 살기보다 주어진 작은 행복을 충분히 누리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더니 아예 삶에 무언가를 늘리지 않고 현재를 지키는 것에 집중했다.
시선이 자기 자신, 나에 도달하자 외부적인 요소로 한계가 있어 포기해야 하는 물리적 소유를 놓아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정신적 분야를 찾아서 파고들었다.
에세이가 크게 유행하며 너도나도 사회를 향해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던 때였다.
한쪽에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협과 범죄를 소개하며 자극하고 다른 한쪽에선 마음을 위로하며 일상을 지키며 행복을 찾자고 한다.
이쯤이면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것인지 일상을 파괴할 세상의 적대자가 고픈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극강의 매너리즘에 빠진 이들의 사소하고 발칙한 유희로 만든 것이 영화나 드라마, 책 같은 매체일지도 모른다.
마치 단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중독자처럼 일상은 지켜졌으면 하지만 가끔 위기를 간접적으로 겪으며 정신적 고난을 얻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 중에 주기적으로 복어 독을 섭취하며 고통을 즐기는 돌고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현 세태를 보자면 이상하게 자꾸만 그 영상이 생각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일상에서 낯선 일을 찾곤 한다.
매일 반복하는 회사 생활이나 직업으로 반복하는 업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여행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익숙한 환경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 낯선 환경에 도착하면 늘어졌던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선다.
인간은 본래 동물적 본성을 지녔고 야생의 적이 없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공간에서 적응할 때까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날을 세운다.
그러니 사실 익숙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나 새로운 공간을 찾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나 기운을 쓰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행지는 스트레스를 즐거움으로 빠르게 대체할 수단이 많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일상에서 새로움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면 일상에 낯섦을 초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간혹 일상 중에 타인이 이해할 수 없거나 보기에 쓸모없는 짓을 잘한다.
하지만 그 쓸모없는 짓이 여행가는 비용보다 10분의 1가량 비용으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니 훨씬 효율적이며 만족도가 높다.
때론 미친 척 일상에 MSG 한 꼬집씩 뿌려주면 어제랑 오늘, 내일이 무척 달라진다.
비슷한 개념에서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개념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전혀 다르다.
매일 마시는 공기가 항상 같아 보여도 같은 자리, 같은 위치에 오가는 사람이 다르다.
또 오가는 사람이 다르니 같은 자리에 머물다 간 미생물도 달라서 어제의 공기와 오늘의 공기는 당연히 다르다.
세포 하나가 성장해서 새 세포로 바뀔 때까지 적어도 3~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어제 마신 공기가 만든 세포와 오늘 마신 공기가 만든 세포가 다르니 당연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절대 다르다.
마치 마트료쉬카처럼 매일 한 꺼풀씩 헌 세포를 벗어내고 새로운 세포로 갈아치우며 외형을 갱신하는 것이다.
극적인 변신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신묘한 변신 쇼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게가 아무리 탈피를 반복한다 해도 게이듯이 인간이 한 꺼풀 벗는다고 외형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 않으며 본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낯선 일로 일상에 특별함을 얻고자 함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껍질만 벗고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단지 인간과 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은 생각하는 힘이 있고 본성을 다루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의 내가 지닌 본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오늘의 내가 영혼의 탈피를 통해 타고난 단점을 가다듬고 새로운 모습의 내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찾는 낯선 일이나 특별함 또는 변신 같은 건 사실 이런 형태가 아닐까.
어제 마신 한숨의 공기가 어디서부터 왔을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는 종종 일반적이지 않은 생각에 푹 빠져 무려 세계관이 지구 단위 급인 상상이나 망상을 잘하는 편이다.
덕분에 만약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서 주변 사람들이 자주 현실에 살라는 따끔한 조언을 해주시곤 했다.
상상에 기인한 이야기는 색다르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반면 깊이 빠져들면 현실과 상상 사이에 끼어 일상을 파괴하는 망상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변명처럼 상기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인류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 과학자 형제 이야기라든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최초로 설명한 철학자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물론 내가 그들처럼 뭔가 대단한 발견이나 발명을 해낸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해낸 데에는 분명 상상이나 망상이 많은 지분을 차지했을 거라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 옛날에 우주의 개념이나 지구의 크기, 세상의 생김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었겠는가.
과학적 근거도 있었겠지만, 물리적 현상을 증명할 과학적 증거조차 처음엔 누군가의 단순한 상상 또는 망상으로 시작했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선생이란 존재가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배움의 장은 뇌 내의 상상극장이 전부인 이유이다.
어린 시절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망토 하나 두른 걸로 슈퍼 히어로가 되고 어두컴컴한 옷장 안은 땅속 깊은 곳에 비밀을 숨긴 비밀 통로가 되며 옷장과 책상 위에 걸친 이불 하나로 우주여행을 하던 때가 있지 않는가.
7세 미만의 어린이는 누구나 아인슈타인과 라이트 형제, 빌 게이츠의 자질을 지녔다.
지금 당장 누군가 내게 중력을 설명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 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중력의 사전적 의미 이외에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상상과 망상을 즐기는 철없는 어른인 나지만 이미 평범의 물이 짙게 배어 제대로 설명하는 방법조차 잊은 탓이다.
과학자의 증명이 아니라 정확하게 중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단 중력이 무엇인지 느낄 필요가 있다.
지구는 적도 기준 시속 1,660km로 자전한다고 한다.
자동차 기준 시속 80km만 밟아도 빠른 속도 때문에 위화감을 느끼고 위협을 받는데 어째서 지구의 자전 속도가 무서운 사람은 없는 것일까.
이렇게 빨리 돌다가 사람의 사지가 다 뜯겨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먼 옛날 어느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또는 자주 상상 그리고 망상을 하며 현대 사회를 세운 가설을 여러 가지 세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상, 망상 또는 현실이 아닌 것을 마음대로 쓸모없는 무언가로 만든다.
사과는 옛날부터 사람들 앞에서 수천 번, 수만 번, 수억 번 떨어졌지만, 거기에 중력이 작용한다는 걸 설명한 건 한 사람이다.
인셉션이라는 유명한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은데 제자리를 도는 팽이가 멈출 듯 멈추지 않는 장면이다.
그저 영화의 복선이라고 놀라워하며 지나버리는 장면에 불과하지만 느끼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 최대의 과학적 비밀이 눈앞에서 펼쳐진 걸지도 모른다.
그저 남아도는 시간을 상상에 할애하고 넓게 펼쳐 보는 것이 현대인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때때로 타인의 상상할 자유까지 쓸모없고 돈과 상관없는 하등한 것으로 취급할 때면, 그 빈둥거리는 시간을 조상님들이 충분히 활용해서 쓸모없는 일을 해준 덕분에 잘살고 있는 줄이나 알았으면 좋겠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쓸모없고 시간 낭비한다는 건 누가 정하는 걸까?
낯선 일은 인생의 탐험이자 모험이고 새로운 시선의 발견이다.
역사라는 위대한 항로의 첫발이자 인간사 발전의 시초인 셈이다.
마음의 병이 창궐하는 이 시대에 진짜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세상의 모든 게으름뱅이와 궤변론자, 낭만주의자, 쓸모없는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대표해서 부르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