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Live well)

2장 #5 추억과 장래희망

by 단영화

직 내가 철이 덜 들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망상 같은 많은 꿈을 꾸고 내가 좀 더 크면 뭐가 될 수 있을지 희망을 품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불혹을 앞둔 이 시점에도 가슴 한편에 사직서가 아닌 장래 희망을 품는다.

비록 거의 40년이나 산 중고품에 가까운 몸뚱이지만 아직 쓸만하고 삐거덕거리긴 해도 멈추진 않았다.

숨 떨어지고 무덤에 뚜껑 닫은 다음 백골로 진토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는 이상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다.

심지어 관뚜껑 닫고 들어가서 못한 일이 생각나 다음날 벌떡 일어나 펜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수 있지만, 쥘 베른이 해저 2만 리를 썼을 때 세간에서 그를 뭐라고 했겠는가.

2025년 오늘날에도 그를 비웃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요즘엔 누구든 원하면 몇만 원에 하늘을 날지만, 옛날엔 가당치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매일을 산다.

나이 먹어 훨씬 좋은 점은 전만큼 세상사에 빡빡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고, 사람 죽도록 미워해 봤자 결국 남는 건 내 마음의 응어리와 몸에 든 병 뿐이고, 내 거라고 두 손에 꼭 쥐어봤자 부서져 한 줌 먼지와 같을 뿐이다.

맛있는 초콜릿은 내 거라고 손에 꼭 쥐고 애지중지하다 녹아서 똥 되게 하는 게 아니라 맛있게 먹고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한해 늙어갈수록 미움이 적어지고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기력이 떨어지는 건지 세상만사 좋을 대로 방치하는 건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다만 매년 내 심지는 굵은 양초의 심지 마냥 단단해질 뿐이다.

아마 그걸 나쁘게 표현하면 뻔뻔해진다고 하는 거겠지.

나의 수많은 철부지 같은 생각 중에 최고봉은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세상은 언제든 나아질 수 있고 나는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해명을 먼저 하자면, 내가 대단해서 하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

최근에 엄마랑 콘텐츠를 만들면서 고전 명작 어린 왕자를 다시 보는 기회가 생겼다.

사람들은 어린 왕자의 순수함과 상상력을 찬양하고 그의 시점을 닮길 바란다.

학창 시절 엉뚱한 생각을 하던 친구가 선생님께 핀잔 듣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면 현 세상에 너무 많은 모순이 세상을 덮치고 있지 않는지 반문한다.

아마 어린 왕자도 대단한 의도를 갖고 모자 또는 보아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생텍쥐페리라는 작가도 별생각 없이 끄적인 글이 나중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걸 수도 있다.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이유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청춘물에 나올 법한 대사에 밝고 희망차 보이지만 실상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당연히 그런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예비 독자에게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생각의 방향이 위와 같다 해서 선하거나 정의롭거나 사회를 이끌어 갈 일꾼이 되기 위해 으쌰으쌰 힘내고 싶거나 하지 않다.

그냥 뱃속 깊은 곳에 그런 생각이 깊이 자리 잡고 있고 나는 그 생각을 바탕으로 살아갈 뿐이다.

몽땅 다 내놓고 투명하게 살기에 사회는 녹록지 않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회의 한 귀퉁이에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잘 간수하고 살아가는 누군가 하나쯤은 내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철이 덜 들어 장래 희망을 품고 산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패배주의와 현실주의가 그저 짜고 쓰기만 한 눈물 맛이라, 인생은 원래 그런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살고 싶어서 철이 안 들고 싶기도 하다.






릴 때 봤던 명작이라 일컫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는 늘 인생과 사회에 대해 허무하게 그리곤 했다.

인생은 실전이고 현실이라 잔인하고 한계가 있고 괴롭고 힘든 것 투성이라고 속삭이면서, 스스로 주제 파악하고 적당히 고개 숙이고 살라는 듯 피력하는 이야기들이 태반이다.

테스라는 고전 명작의 경우 여자의 일생이라며 고되고 힘들고 수동적이고 일평생 당하기만 하는 이야기를 하지를 않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 첫사랑에 실패해서 괴로워하다 죽는 이야기를 하지를 않나 또 그런 이야기를 명작이라고 어릴 때부터 권장 도서로 삼아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현실 파악이라 하라는 듯이 아이들에게 읽힌다.

매번 방학마다 권장 도서를 읽고 명작집을 독파하며 쓰디쓴 좌절에 괴로워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다 자라기도 전에 간접적으로 패배를 익히고 언젠가 당할 고통을 미리 가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푸릇한 싹을 미리 제거하여 입맛대로 재단한 영혼을 키우는 그릇된 교육 아닐까 싶다.

인생의 씁쓸함을 간접적으로 곱씹으면서도 나는 매년 즐겁게 다른 장래 희망을 썼었다.

살면서 별의별 다양한 일이 있었지만 언제나 꿈의 목적지가 사회적 성공이나 돈은 아니었다.

이 지점이 우리 엄마를 무척 괴롭혔다.

부유하지 않은 집에 태어나 입신양명해야 하는 장녀지만 환경 따윈 전혀 고려치 않고 흥미와 재미 위주의 장래 설계서를 짜서 지원해 달라는 자식을 바라보는 엄마의 속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항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말없이 오랜 시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말을 듣지 않는 반항은 효과가 거의 없으면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의 인생만 좀먹을 수 있으니, 부모님과 타협은 적극적으로 떼쓰며 하기를 권한다.

아마 장래 희망의 문제보다는 목표나 목적이 허무맹랑했다는 문제가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최초의 꿈은 소설가였는데 전혀 밥벌이가 되지 않을 법한 직업이었다.

부모님과 전혀 타협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여자애니까 여성스러운 직업을 갖길 바랐다.

아나운서나 스튜어디스, 선생님 같은, 누가 봐도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직업이었다.

아마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여성스럽다고 오해하신 모양이었다.

딱 한 번만 동생이랑 싸우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 꿈은 소설가에서 갑작스럽게 우회로를 탔다.

성적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선생님과 의료인만큼은 절대 하기 싫었다.

이공계에서 호기심 생길 분야를 뒤지다가 조향사, 건축가, 비행기 조종사를 꼽았는데 알고 보니 세 직업 모두 공부 기간이 길었다.

심지어 비행기 조종사는 당시 알아보니 시력도 봤다.

양쪽 시력 모두 마이너스 대인지라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았다.

최종 목표까지 도달할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결국 우회에 우회를 거쳐 컴퓨터 전공으로 극적인 타결을 봤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이 막 성장을 시작한 시기였고 정부에서 정보통신 분야에 예산을 쏟아부으며 이공계가 한참 붐이었던 시기였다.

나 역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진학을 했고 졸업 후 바로 취업도 했다.

대학에서 교수님이나 선배님들, 회사에서 상사의 조언으로 취업 후에 공장 회로 설계나 프로그램 영업을 진로로 염두에 뒀었다.

중간에 이 공부, 저 공부하면서 처음 특허를 접했다.

취업 후에 바로 글을 썼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때 접한 특허에 매력을 느껴 갑자기 변리사 자격증 수험 생활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위에 언급한 길고 긴 과정의 최종 목표는 소설가이다.

수험에 실패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방황하다가 지금 오늘에서 이제야 한 걸음 뗀 셈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여전히 아직도 최종 목표는 소설가다.

다만 소설가로 가는 도중에 많은 중간 지점이 있는 것이다.

직업을 갖고 사회에서 활동해 보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만들어 보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도를 하고 예상하지 못한 인연들을 만나면서 꿈꾸던 세상으로 한 발씩 가는 중이다.

최종 목표인 소설가 말고 가는 과정에 새로 품은 꿈이 하나 있다.

현재 품은 이 꿈도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내 본능대로 사회가 더 나은 대안을 찾도록 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야 온 천지에 널리고 널렸다.

문제는 항상 어떻게 이다.





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싶다는 목표 자체가 참 모순됐다.

좋은 방향은 어느 방향이며, 좋으면 누구를 위해 좋은 것이며, 범세계적 세상에서 대한민국에 국한된 이야기라면 응당 언젠가는 모순이 생길 테고, 그 또한 이기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좋은 방향이란 그럼 어떤 방향인가.

세상이 모순덩어리라면 모순을 푸는 방향이 좋은 방향일 수도 있지만 모순을 방치하는 게 좋은 방향일 수도 있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다면 고통도 고통의 가치가 있을 것이고 모순도 모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수레바퀴처럼 굴러온 지금까지 세상에서 인간이 겪은 수많은 오류와 그 결과가 반복해서 보이는 거라면 막아서는 것이 좋은 방향인가.

거대한 지구 시간의 흐름 앞에 그 큰 의지를 한낱 개인이 가늠해 본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현상의 원인과 이유,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아마 이 큰 굴레의 작은 실마리를 잡는다면 이것 정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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