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 오기
그날이 왔다.
다정의 공모전 마감일이자 호정의 시험 당일이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시간, 호정이 한 손엔 노동법책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맨 밥에 간장을 대충 비벼먹고 있다. 지난 자정 12시에 다정이 작품을 잘 제출했나 궁금했지만, 호정은 애써 관심을 껐다. 일주일 내내 이런 식이었다. 호정은 차마 다정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이름 모를 감정들이 가슴팍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가끔 부엌이나 화장실에 갈 때조차 호정은 다정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일단 시험을 잘 봐야 해.' 호정은 인사노무관리 책을 꺼내기 위해 식탁 위 가방을 열었다. 다른 책에 비해 크기가 작아 한번에 찾기 어려워 이리저리 더듬거리는데, 갑자기 방 문 소리가 들렸다.
다정이었다.
놀란 호정이 가방을 떨어뜨렸다.
일주일 만이었다. 다정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곤 호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호정은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계속해보자는 거야?'
피를 한바탕 쏟았던 그날, 다정이 한 말이 천둥처럼 떠올랐다. 그때였다. 다정의 맨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며 쩌억 쩌억 소리를 낸 건.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급해진 호정은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퍼를 채 닫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부랴부랴 현관으로 향했다. "악!“ 가방에서 두꺼운 책이 흘러나와 호정의 엄지발가락에 떨어졌다. 호정은 반사적으로 발을 움켜잡고 웅크려 앉았다. 고개 숙인 채 아파하는 호정의 뒤로 다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원치도 않는 결혼, 망가진 책, 사라진 그림 파일.
그다음엔 뭘까.
호정은 지금이라도 몸을 일으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리가 저려왔다.
"내내 생각했어."
다정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 보러 가는 날 아침, 너에게 어떤 벌을 줘야 할까?"
호정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에 소름이 끼쳐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박살 낼까, 발가락을 부러뜨릴까 아니면..."
“…”
"신분증을 훔칠까."
호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앉은자리에서 재빨리 눈앞에 쓰러져 있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에도 파우치에도 가방 앞부분 주머니에도 신분증은 보이지 않았다. 호정은 거칠게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크고 작은 물건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그런데.“
다정의 낮은 목소리에 정신없이 물건을 살피던 호정의 손이 멈췄다.
“그딴 거 안 해."
‘뭐..?’ 호정은 속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 이젠 다신 안 해.“
다정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호정은 코 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곤 황급히 얼굴을 감쌌다.
"…시험 잘 봐, 호정아.“
다정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더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호정은 손을 내린 채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필통에서 반쯤 고개를 내민 신분증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다정이 떠난 자리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호정이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이었다.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18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