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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Oct 15. 2024

[자매성장소설] 16.실수

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 오기







16.실수




호정의 책이 망가진 지 일주일 하고 나흘이 지났다.


다정의 웹툰 공모전 마감도 호정의 공인노무사 2차 시험도 일주일이 남았다. 그동안 호정은 방에만 박혀 회독에 미친 듯 몰두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공부만 했다. 밥은 앉은자리에서 바나나나 시리얼만 먹었다. 허리와 손목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책상 아래엔 다 쓴 일회용 인공눈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호정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공부만 하는 바람에 다정은 호정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호정의 방 문 앞에만 서도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사과하고 싶은데....’ 다정이 호정에게 받은 상처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감정보다 미안한 마음이 컸다. 호정의 시간과 노력이 깃든 소중한 책을 내팽개친 것에 대해 두터운 죄책감을 느꼈다.


‘내 마음만 밀어붙일 수는 없지.’ 다정은 생각했다. 호정이라면 지금 다정과 쌓인 감정을 푸는 것보다 눈앞의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 몰입하고 싶을 것이다. 다정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

.

.


새벽 2시, 호정은 화장실에서 코피를 쏟았다. 규칙적인 생활 패턴으로 매일 7시간씩은 꼭 자고 공부하던 호정이었다.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피를 봐서 그런가. 호정은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아직 오늘 회독할 양이 남아있었다. 호정은 방으로 향했다. 멈칫, 다정의 방 문 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호정은 다정에게 하려던 말을 아직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된 거 다시 시작하자‘라는 그 말을.


빼꼼, 호정은 방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엔 노트북과 태블릿이 켜져 있었다. 호정은 홀린 듯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와, 잘 그렸네.’ 호정은 다정의 그림을 볼 때마다 편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인체 비율과 사실적인 묘사에 자신이 없어 아기자기 귀여운 그림체로 승부한다고 치부했다. 그런데 지금 호정 눈앞에 있는 그림은 금방이라도 태블릿 밖으로 살아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못 그린 게 아니고 안 그린 거였구나.’ 자꾸만 보고 싶은 그림이었다. 호정은 자신도 모르게 태블릿 펜을 쥐었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고 싶었다. 호정의 서툰 손짓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정은 답답했다. 옆에 한 손 키보드가 보였다. 인쇄는 되어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아래 화살표 자리인 것 같은 위치의 자판을 눌렀다. 그러자 이상한 창이 떴다.


“뭐 해?”


갑자기 들려오는 다정의 목소리에 호정은 놀랐다. 손이 얼떨결에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픽-.

그림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뭐, 뭐 한 거야?“ 당황한 호정은 다정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뭐 누른 거 아니지? 아무거나 만지면 안 돼. 내가 편한 대로 설정해 놓은 건데“


호정도 본인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코피 좀 흘렸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다정은 침착하려 애쓰며 마우스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책상에서 손을 뗀 채 울먹이며 말했다.


“사과하려고 했어. 나 진짜 사과하려고 했는데.”


“아니, 사과 안 해도 돼.“ 호정이 말했다. 이어서 ‘책 망가진 거라면 나 진짜 괜찮아'라고 말하려는데, “화 많이 났구나.“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다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 호정은 머리가 굳어짐을 느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정은 조용한 그 몇 초를 호정의 분노로 받아들였다. 다정의 눈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설마 지금까지 그린 거 다 날려버리려고 그런 거야?“


“아니 그게…“


“그래! 나 때문에 책 망가진 건 미안해. 근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네가 먼저 내 꿈을 무시했잖아.”


“아니 그건…“


“아니면 뭐, 집에 눈이 멀었어? 가족이고 뭐고 그냥 돈 되는 거 다 갖고 싶고 그래? 너 다 해. 이젠 집을 갖든 팔든 상관 안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그냥 이거, 내 꿈. 내 꿈 좀 그만 못살게 굴면 안 되겠니?“ 갈수록 커지는 다정의 목소리를 들으니 호정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제발 호정아, 우리 그만 좀 하자고. 어?"


호정은 현기증을 참으려 인상을 팍 썼다. 다정은 호정의 미간에 생긴 깊은 주름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뭐, 계속해보자는 거야?!“


다정의 높은 음성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비린내 나는 뜨거운 덩어리가 호정의 입 안에 빠르게 차올랐다. 호정은 입을 막고 화장실로 황급히 달려갔다.


“우으으윽!“ 호정이 뱉어낸 핏뭉치가 변기 안을 빨갛게 물들였다. 호정은 그날 처음 알았다. 코피가 갑자기 너무 많이 나면 입 안까지 넘친다는 것을. 호정은 변기에 얼굴을 박고 피를 쏟고 또 쏟았다. 겨우 멈추고 나서는 화장실 바닥에 멍하니 앉아 쉬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몇 분이나 지난 거지.’ 호정은 기운 빠진 몸을 억지로 이끌어 다시 다정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16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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