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2024년을 마무리하며(1편)에 이어서 한 해 동안 내가 일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던 러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원래 이 글은 1월에 발간하려고 했는데, 연초에 계속 야근한다고 미루다가 겨우 쓰게 되었다.
3월이 다 되어가서 24년도에 대한 리뷰를 하려니까 기억이 날랑말랑 하지만 그래도 코로스앱과 사진첩을 보면서 그동안 뛰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기억나기 시작한다.
24년도는 객관적인 지표로만 봐도 러닝붐의 해였다. 22/23년도 대비 대회수가 훨씬 더 많아졌고, 커지는 시장에 편승하기 위해 많은 러닝 브랜드들이 떴다. 트렌드코리아에서도 러닝붐과 호카,온러닝,아식스의 부상을 언급했을 정도다. SNL코리아에서는 러닝크루를 러닝이 아닌 연애의 목적으로 가입하는 것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일반 대중들도 러닝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봄, 가을이 되면 어느 때보다 트랙에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근데 솔직히 1,2레인에서 길막은 하지 말자...)
개인적으로는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러닝의 효능을 다들 알아가고 있는 걸까. 요새 뛰기 시작하는 지인들은 나보고 어떤 계기로 러닝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종종 묻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겐 그렇게 큰 동기부여가 없었다. 러닝을 기필코 해야겠다는 마음가짐보다 그냥 언젠가부터 밖에 나가는 걸 습관화하고 조금 뛰기 시작하다 러닝이 좋아진 케이스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한 순간은 21년도 추석 때부터였다. 당시 나는 109kg가 나가는 거구였고 고등학교 3년, 대학교 6년 동안 공부가 내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엉덩이 붙이고 책상에 앉아있는 것 말고는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었다. 입사 1년도 안된 때였는데 추석 때 본가도 안 가고, 회사에 우두커니 앉아서 근무 같은 공부를 하던 와중에 알 수 없는 우울증이 덮쳐왔다 (살이 쪄서 생긴 우울증인지, 추석 때 일해서인지는 모르겠다만). 낮엔 큰 조직에서 미약한 개인으로, 밤엔 6평 남짓한 방에서 그저 하루하루 출근하기 위해 살아가는 주객이 전도된 느낌으로 계속 짓눌려있었다. 햇볕도 잘 못 보고 카페인으로 불면증까지 얻으니 밤에 생각만 많아지고 늘 반복된 일상이었는데 이걸 탈피하고자 밤에 일찍 자기 위해 공원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공원을 한 시간, 두 시간씩 걷고 오니 몸도 피곤해져 있고 씻고 자기에 알맞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고 야간에 많이 걷다 보니 이왕 운동한 게 아까워서 식단도 조금씩 건강하게 먹어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걷는걸 계속 반복해 보니 문득 뛰는 것도 해보고 싶어졌다. 이제 걷는 게 쉬워지고 지루해져서였을까 도파민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아주 짧게 뛰고, 걷는 걸 반복했다. 그렇게 10m, 20m, 30m, 50m 이런 식으로 뛰는 거리를 점차 늘리면서 속보와 병행했다. 그리고 1분 동안, 3분 동안, 10분 동안, 30분 동안 달리기를 계속 지속해 나갈 때마다 몸은 바뀌었다. 가벼워질수록 뛰는 게 더 빨라지고, 더 많이 뛰게 되었고,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도파민 무한 사이클이었다.
추울 때부터 뛰기 시작해서인지 봄, 여름, 가을엔 러닝이 더 재밌게 느껴졌다. 계절별로 느껴지는 공기의 무게, 시간대별로 다르게 느껴지는 햇빛, 바람, 온도, 그림자. 코스별로 시시각각 다른 것들이 보이고, 눈, 얼음, 벚꽃 잎, 꽃가루, 낙엽을 밟으면서 뛰는 것도,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여유롭게 뛰는 이 모든 자극들이 새로웠고 즐거웠다. 이렇게 서술하면 내가 마치 낭만주의자처럼 비치는데 당시엔 사실 이런 낭만보다 상당히 목표주의적인 관점으로 달리기를 지속했었다. 23년도엔 나가는 대회마다 PB(Personal Best)를 깨곤 했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크루에서 별명이 '서 PB'로 한때 불렸다. (다시 별명값을 해야 하는데..). 늘 운동화 끈을 묵기 전에 오늘은 어떤 페이스와, 시간으로 세션을 마무리할 건지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말 심장 터져라 뛰었었다. 러닝만큼 정직한 운동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뛰는 만큼 기록이 나오는 운동이다. 정말 나 스스로가 발전하고 있다는 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운동이다. 누적되는 성과와 갱신되는 기록에서 모종의 희열을 느꼈다. 출력이 빠르다는 것은 피드백이 빠르다는 것이고 즉각적으로 성과가 나오면 도파민이 나온다. 그래서 중독이 된다. 술, 담배, 마약, 도박, 게임에 중독되는 원리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러닝은 빠른 피드백과 더불어 runner's high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운동보다 metric이 잘 발달되어 한 보 한 보 내딛을 때의 모든 데이터가 누적되고 정확하게 집계되는데 스스로 내가 뛴 모든 순간을 기록했었다. 왜 이때 케이던스가 낮았는지, 왜 동일한 페이스에서 심박수가 높게 나왔는지 (온도의 차이인지, 습도의 차이 때문인지, 영양 문제인지), 신발은 무엇이었는지, 등 모든 걸 기록했었다. 대회도 늘 소정의 목적을 가지고 참가했었다. 기록을 내기 좋은 코스인지, target time은 어느 정도인지, net time이 마일리지 대비 어느 정도 개선되고 있는지 등 나만의 대회 일지는 지금도 꾸준히 작성하고 있다.
2024년엔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대회와 메이저 대회들 위주로 나갔었다. 더불어 처음으로 커플런을 가언이 와 함께 뛰면서 처음으로 시상대에도 올라가 봤다. 상준형님 덕분에 오사카 마라톤도 재밌게 즐기다 오고 띠 크루 덕분에 부산, 제주도에서 정말 잊지 못할 추억도 남겼다. 우리가 달리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려고 뛰는 게 아닐까? 더 행복한 2025년을 위해 작년보다 더 열심히, 즐겁게 뛰어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