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fter rea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yner Aug 27. 2019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가의 일 - 김연수]


1. 반성


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장르의 책을 좋아하는지,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을 때면 나는 어렵지 않게, 아니 확신에 가득 차서는 나는 소설(fiction)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수필과 같은 non-fiction 장르에 대한 찬양이 깊게 녹아든 탓이 컸으나, 사실은 소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탓이 크다. 또는 일부 ‘흥행 대박’을 노리는 공상과학(sci-fi.) 영화 등을 소설 종류의 대표 사례라고 치부해버린 일방적인 나의 편의주의적 발상도 한몫했다.


그랬던 나는 김연수의 글을 읽은 지 삼일 만에,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소설은 사실이 아니어서, 마치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동네 심심한 사람들이 지어낸 ‘임금님 당나귀 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지난번 글('우리 변하지 말자, 그 광기 어린 투정')에서 언급했던, 시 교육에 대한 어릴 적 ‘악몽’과 유사하게, 내가 소설을 접했던 유년시절의 그 잘못된 접근법에 기인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수많은 fiction들을 로봇 변신 합체하는 이야기로 치부하거나, 소설을 좋아하는 취향에 대하여 일상이 단조로워 무언가 재밌는 거리가 필요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대리만족 성향의 부류라고 치부해버린, 나의 그 모든 선입견과 마음가짐을 반성한다.



2. 공감


나는 처음부터 사실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야 한다. 실제로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길 때만 해도, 나는 이 글에 이입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가 집중했던 것은 이 글의 포맷이나 그 자유분방함 그리고 이것이 소위 현대의 문학 씬(scene)에서 꽤나 먹히는 기법이라는 것이 흥미로웠을 뿐이다. 나와는 다른, 그냥 ‘그사세’(여기서 ‘그들’은 내가 동경하는 부러운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를 포함한 we의 반대어로서의 they)가 사는 모습을, 독후감을 쓰려면 읽긴 해야겠으니, 요즘 서점에서 잘 먹히는 스타일이 뭔지 궁금해 한번 쓱 눈을 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작가와 나의 차이점을 찾는 것보다 공통점을 찾는 데에 더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제야 내 삶의 많은 일들이 소설가의 일과 같았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내가 틀려왔다는 것을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과장해서, 그것은 소설가의 일들을 설명한다기보다는 누군가가 나의 일상을 관찰한 결과물에 가까웠다.


나는 기획자다. 소위 전략기획이라는 분야에서, 그 이전의 삶에서 즐겼던 감상적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치열하고 효율적으로, 보다 사실관계에 기반한 전문적이고 다양한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흔적이 남도록, 그러나 절대로 (아마추어같이) ‘무식한 전문서적’ 같은 느낌은 들지 않도록, 보는 이의 눈높이에 맞는 설득을 하고 그로 하여금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그런 글을 쓰는 기획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전공도 이와는 거리가 멀었고, 사회에 나와서 흔히 말하는 ‘실전형 인재’(라고 포장하고)의 길을 걸어오려고 했던(사실은 정규 교육과정 등으로 이론을 선행 학습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소설가의 일’은 곧 '기획자의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내가 하는 일, 내가 해야만 하고, 잘할 수 있어야 하는 역량들과 소설가의 역량들이 겹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내가 누군가 나의 일에 관해 묻는다면(특히나 처음 보는, 나를 잘 모르는 상대라면 더욱) “전략 기획이라는 일을 하는데, 아직 전략이 뭔지, 기획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로 반쯤 웃으면서 넘기는 상황에서, (진지 빨고) 면접스럽게 대답한 느낌이다. 기획이란 소설을 쓰는 일 그 자체일지 모르겠다.


나는 기획 업무를 배우면서 감상적 글쓰기에서 벗어나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쓰기를 연습해야 했다. 내가 아직 일이 서툴었을 때, 보고서에 적은 몇 마디 초안이 깊이 없고 추상적인 데다가 그 논거 또한 막연하고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나는 그 ‘토할 것만 같은’ 초안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꼈었다. 내가 그 무기력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그 순간들이, 소설을 쓰는 일에 필요한 굳은살로 쓰일 것을 생각하니, 왠지 생각보다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 핍진성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잘했다. ‘자주, 곧 잘(often)’ 했다는 뜻이 아니라, 능력적으로 그럴듯한 말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거짓말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늦지 않은 나이에 발견했고, 부끄럽지만 실제로 내 삶에서 많은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재능 찬스’를 활용했다는 것을 조금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는 거짓말에 재능이 있었다. 이는 대단히 종합적인 판단 능력인데, 기본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기초가 되어야 했다. 화자와 청자 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그동안 평소 내가 즐기거나 능히 그러했을 만한 행동 양식들을 유추해 그 연장선상에서 ‘결과물’을 내놓았고,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속아 넘어갔다. (적어도 그들 모두가 나를 위해 속아준 척 하진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은 꽤나 논리적이고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음에 크게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근거와 언변적 스킬들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이것이 내가 가진 능력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능력이라고 (남몰래) 자부해왔다. 그런데 이 능력이 소설가가 되기 위한 준비 역량이라니. 나는 지금 소설을 쓰러 간다.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벌리기 위한 나의 훌륭한 노후준비의 일환으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만약 10년쯤 후에 내가 소설의 갈래로 경제적 이득을 봤다면, 하다못해 동네 주민 글쓰기 대회 입상이라도 한다면 김연수 작가에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마음으로) 쓰겠다.  



4. 급하게 마무리하며, 포장, 포장


이쯤 되면 내가 왜 반성문을 쓰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설명은 되었다. 다만 시간에 쫓기는 내가, 이 깨달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인지 좀 더 꾸미고 강조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이 역사를 찬란하게 포장해줄 훗날을 기대하며, 무책임한 지금의 내가 좀 더 나아졌을 미래의 나에게 부탁한다. 동네 주민 글쓰기 대회 입상 소감 자리가 그 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5. 원래 중요한 것은 가장 마지막에


갈 땐 가더라도, 나중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소설가에 대한 다시 보기를 진행한 이 시점에 그들이 작품에 쏟아 넣은 노력과 헌신에 존경의 마음을 표하려고 한다. 시나 수필 같은 다른 문학 장르에 부여했던 그 어떤 마음보다 더.


그들은 종합적인 판단능력과 상상력 그리고 이를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효과적인 돌려 까기 전문가), 플롯과 캐릭터, 다양한 인물관계,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잘 버무려 맛깔난 요리를 내놓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러한 역량은 단순히 재능을 넘어 타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진심, 고민들의 결과일 것임에 틀림없다.


피카소는 몇십 분 만에 쉽게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몇십 분 만에 그려내기 위해 몇십 년 동안을 그려왔다고. 김연수는 말한다. 소설가는 모든 질문에 구체적이고 핍진성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깊은 존경과 사과를 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르의 주제 편향도 흘러가는 유행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