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fter rea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yner Jan 03. 2020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1.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들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런 시간을 갖게 되길 희망하고 기다려왔다. 크고 작은 굴곡의 끝 자락 어디 즈음에는, 슬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 순간들이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행복의 상징이길 바랐다. 누군가의 목표이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길 바랐다.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적절하고 충분한 실패와 성장을 통해 드디어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그런 현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다. 창진이는 참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저런 거야, 하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 행복의 list는 나날이 늘어갔고, 이제는 어느덧 주제넘게 행복의 무엇인지, 행복해지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늘어놓는 내가 있었다. 때로는 적절한 과장과 표정을 섞어가며,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내용으로 대서사의 마무리를 지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나만의 행복 그래프가 더 이상 불행과는 관련이 없길 바랐다. 슬픔의 감정과 순간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고, 힘겨워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서도 누구나 각자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다고 여기거나, 이도 저도 피할 방법이 없을 때에는, 그저 그것이 그 사람의 안타까운 운명이나 업보겠거니 하는 방법들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브런치 서랍 어딘가에 비공개로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다가왔을 때 나를 지켜내는 법' 따위를 끄적거리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내 행복을 지켜주는, 나의 무너지는 다리를 지탱해줄 안전 자산 같은 방어구로 여기는 시간들이 있었다. 슬픔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고 여겼다. 나는 피하고 또 부정했고, 점점 능숙해져 갔다.



2.

얼마 지나지 않아,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해야 했다. 내가 누리는 수많은 행복과 슬픔의 여집합들이 사실은, 슬픔이 자리할 곳 없는 완벽한 삶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기보다, 마땅히 느끼고 공감했어야 할 슬픔들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지기 위한 부단한 의지의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하루하루 나약해지는 나를 위해 기껏 내가 쏟은 노력이라고는, 내가 조금 더 행복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행복의 더듬이를 풍성하게 만들려는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슬픔과 불행을 감지하고 공감하는 더듬이는 건조하게 말라갔다.


나는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행복의 좋은 신호라고 여겼고, 나 자신마저 방치한 고통을 느끼는 감각은 그 누구도 돌보지 않게 되었다. 행복하다고, 이제야 행복을 한없이 누리게 되었다며, 다 큰 성인이 천진난만하게 돌리는 행복 회로에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릴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그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몇 명이나 귀담아 들었을까. 아니, 몇 명이나 내 얼굴을 세게 치고 싶었을까.


나는 행복한 사람, 복 받은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모습이 안타까웠다. 불쌍하고 모자란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 내 오랜 목표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