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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슬픔으로 쓰기를

by DY

잠시 멈춰 있던 자동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을 알리는 선생님의 포스팅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합석 하기로 했다. 반가움과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심리 상태와 그것을 기반으로 표출되는 모든 것들의 색채는 죄다 회색빛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글 혹은 사진 혹은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이 타인에게는 썩 좋은 감정을 주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또또 눈치 본다. 화면속 텍스트로 만날 뿐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부정함을 선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최근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나를 알아가고 있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습관과 기질이 많아서 놀라움과 걱정거리가 많아졌다. 그 중 하나가 눈치다. 이미 알고있고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었지만, 생각보다 그 덩어리가 훨씬 컸음을 알아차렸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 함을 의미한다. 상태의 기분에 따라 언행이 달라진다. 거짓의 가면을 쓴 모습으로 상대한다. 속마음이 감춰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정작 마주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진심이, 사랑이 느껴지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그랬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그럼에도 말과 글로 표현되는 것들에 자신감이 결여된 채, 스스로에게조차 무거운 짐 한 보따리를 둘러메고, 좋은 척, 괜찮은 척한다.


최근에 읽었던 림태주 작가의 한 문장에서 자신감을 얻어본다.


“슬픔을 슬픔으로 쓰기를”


슬픔을, 우울함을 애써 피하려고 했다. 그럴수록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주위를 빙빙 돌며 어지럽히고 있었다. 림태주 작가님은 슬픔을, 감정을 감추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했다. 타인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단어와 비슷한 맥락이다.


“너는 보살 같아”

“님은 참 무던한 사람이야.”


좋든, 싫든 크게 내색하지 않는다. 나름 ‘일희일비’하지 말자라는 주의지만, 로봇 혹은 비인간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문제로 상담을 나누고 난 후의 생각이다.


‘딱히 표현하지 않으니,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이 없어 보이고, 그렇게 사람들 틈에서 호불호가 없는 사람,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멀어져 간 게 아닌가. 결국 이렇게 혼자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이런 모습도 사랑해 줘야지, 앞으로는 변화해야지, 하는 다짐이나 의지가 생기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애써 위로하지도 않는다. 다만, 불편이라는 잔여물이 남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표현해야 함은 분명하다.


2025년의 절반도 남지 않은 지금, 감정의 배출 혹은 가슴 깊숙히 묻기 위해 연차를 많이 사용했다. 다음 주면 또 6일간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후반기는 1.5일의 휴가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건 그때 상각하기로 한다.


토요일을 제외하면 아무런 일정이 없는 무계획의 여행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지 궁금하고, 두렵다. 23일 오전 출발이지만 솔직히, 아직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당당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곳의 나처럼 인간과의 대면을 최소화하며, 결코 자유롭지 못 한 자유를 느낄 것인가. 언어가 통하지도 않고, 문화도 잘 모르는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어쩌면 외계인으로서의 방문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조금은 다른 동네에서 6일간 잘 지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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