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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런 영화

<리얼 페인>

쉽사리 종지부 찍지 못한 감정들을 위해 묵묵히 기다려주는 영화

by FREESIA

본 리뷰는 1ROW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소정의 활동비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런 데서 터놓고 안 슬퍼하면 대체 언제 하냐?
영화 <리얼 페인>

별에도 온도가 있다. 그리고 그 표면 온도에 따라서 별의 색깔도 다르게 나타난다. 언뜻 직관적으로는 붉은색 별이 가장 뜨거울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은 그 반대다. 아이러니하게도 붉은 별은 가장 차가운 별이고, 파란 별은 가장 뜨거운 별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로 역사 투어를 함께 떠나기로 한 사촌 형제 데이비드와 벤지는 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듯 공항에서 서로 껴안으며 인사했다. 두 사람은 어릴 적엔 쌍둥이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였지만 이제는 서로 너무나도 달랐다. 데이비드가 파란색 옷을 입었다면, 벤지는 붉은색 겉 옷을 입었다. 데이비드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 사랑스런 가족이 있지만 벤지는 최근 할머니의 죽음 이후로 많이 힘들어했을 만큼 불안한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히 반대였다. 데이비드가 소심한 원칙주의자라면 벤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직설가였으니까.

영화 <리얼 페인>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사 투어에서 데이비드와 벤지는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바르샤바에서부터 루블린까지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그리고 그 당시 전쟁 영웅들의 동상과 죽은 자들을 위한 무덤,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살았던 마을, 마이다네크 수용소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스크린으로 바라보는 관객인 나 역시도 이 여정을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차분하게 그곳을 관찰하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말이다. '이것은 아픔에 관한 여행입니다.' 가이드의 말처럼 그들에게 있어 이 여행은 아픔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과거 유대인의 아픔에서부터 현재의 우리들의 마음속 아픔이란 감정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같이 울고 웃으며 조금씩 진정한 아픔에 대해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다.

영화 <리얼 페인>

여기서 특히 벤지가 아픔을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남다르게 느껴진다. 그는 함께 여행하는 일원이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것 같다며 먼저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역사를 알아가는 여러 프로그램 활동을 할 때 가슴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단순히 표면적인 정보 습득에 그치고 마는 '이해'의 방식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화를 내는 벤지의 거침없는 행동은 한 집단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너무 고통스러워서 모른 체하고 마는 '아픔'이란 감정을 낱낱이 분해해 보고, 느껴보고, 제 손으로 이어 붙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벤지의 행동들을 다시금 떠올려보자면 그는 여행 내내 아픔이란 감정에 힘겨워 보이기도 했지만 또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영화 <리얼 페인>

더 나아가 영화는 상처를 극복하는 '연대'의 힘을 특유의 유쾌한 시선으로 제안하고 있다. 정반대의 성격의 데이비드와 벤지가 서로 옥신각신하기도 하고 아이처럼 소동극을 벌이기도 하는 장면들은 볼 땐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그 케미가 사랑스럽고 힐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벤지의 적극성은 걱정이 많은 데이비드를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반대로 데이비드는 벤지에게 그가 질투가 날 정도로 에너지 넘치고 매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서로 다른 사람을 옆에 둔다는 건(그것도 며칠 동안 같이 여행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고역일 수도 있겠지만 뜻밖에도 타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고, 무엇보다 나조차도 외면해 왔던 유치한 감정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우리라서 가끔은 혼자가 된 것만 같은 순간도 있겠지만 이들의 여행처럼 서로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조금은 숨 쉴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픔이 마냥 무섭지만은 않다.

영화 <리얼 페인>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팽의 여러 연주곡을 배경 음악으로, 슬프기도 하지만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폴란드의 풍광을 보여준 영화 <리얼 페인>은 유머와 잔잔한 울림으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작품이다.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할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범주를 좁혀 오며 마주한 아픔의 감정은 때론 우리를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 누구의 것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여정이 끝이 날 무렵에 처음과는 반대로 붉은색의 옷을 입은 데이비드와 파란색 옷을 입은 벤지가 나누는 포옹은 그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와 힘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앞으로 그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행의 기억을 벗 삼아 다시 이 멋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프면 충분히 아파하고 또다시 일어나 새로운 경험에 주저하지 않으면서! 아픔을 잊지 않되 조금은 마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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