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믿는 것만큼 보려 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
추억을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게 담아두고 언제든 병만 열어 그 추억을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을 처음으로 찾아봤다. 1940년대 작품 치고는 오늘날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구성이 잘 짜여져 있다. 어느 날, 한 여자는 절벽 앞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신사 맥심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우연적인 만남이 이어지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실 맥심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대저택 '맨덜리'에서 살고 있지만 교양, 지성, 미모까지 갖춘 레베카라는 부인과 사별하여 그 슬픔에 빠져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만나 조금씩 미소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와 결혼한 이후 모든 것이 낯선 맨덜리 저택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전처를 잊지 못하는 듯한 맥심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레베카를 무척이나 아꼈던 댄버스 부인은 그녀를 레베카와 은근히 비교하고,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며 조롱한다. 맥심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외로운 저택에서 그녀는 매일이 슬프고 불안하다.
그러던 어느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숨겨진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레베카>는사실 스토리보다는 연출력 면에서 더 빛을 발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는 한 번도, 심지어 회상씬으로도 레베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곳곳에 새겨져 있는 'R'이라는 글자가 반복하여 나오는 것처럼 어디선가 레베카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중반부에 댄버스 부인이 그녀에게 레베카가 썼던 방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설명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레베카의 아름다움이 절로 그려지게 한다. 소문으로, 주변 사람들의 말들로, 그리고 댄버스 부인의 묘사로 그녀와 우리는 레베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상상하고 있었다. 더불어, 별장에서 맥심이 레베카가 죽었던 날, 그녀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장면 또한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맥심이 그 날 레베카가 했던 말과 행동을 읊으면, 그녀의 움직임을 빈 화면으로 따라가며 담아낸다. 보이지 않는데도 그녀가 보이는 듯한 그 미묘한 느낌을 단순한 기법인데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처음에 여자는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의 레베카를 질투하기도 하고, 닮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한다던 맥심의 마음을 늘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사실 맥심은 레베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증오한 것이었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을 했다며 그에게 도발하는 레베카의 뺨을 때렸을 때, 레베카는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맥심은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인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레베카와 연인이었던 잭 또한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봐왔던 레베카는 그런 선택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좀처럼 외부 사람들은 이미 사건 발생 2개월 후 맥심이 시신을 확인했음에도 레베카의 진짜 시신이 나온 이 이상한 상황에서 명성이 자자한 맥심을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상황은 그녀가 자살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맥심은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흘러간다.
법정 사람들과 함께 레베카가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의사의 증언을 듣기 위해 간 그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사실 레베카는 임신을 한 게 아니라 암 말기였다는 것. 레베카는 그 슬픔에 맥심이 자신의 뺨을 때린 뒤 스스로 쓰러져 머리를 부딪히고 자살한 것이다.
하지만 가끔 추억의 병들이 악마를 담고 있다가 미칠 듯이 잊고 싶은 순간에 튀어나오기도 한다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는 여자.
자신이 레베카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맥심.
레베카는 자살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잭.
암 말기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임신했다고 말하는 레베카.
사랑하는 레베카에 대한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댄버스 부인.
이 모든 인물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실들 사이에서 그들이 얼마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며 그것들이 진실이라 믿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초반부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은 점점 맨덜리 저택을 가까이 담아낸다. 처음에는 저택에서 빛이 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달빛에 의해 빛나는 것이었고, 이내 구름이 달을 가리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레베카에 대한 진실은 그녀만이 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달빛에 비친 아름다움, 그리고 구름에 가려 이내 사라지고 마는 아름다움. 그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평점: ★★★★☆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