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런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온 세상이 색으로 채워지는 것임을 보여준 영화

by FREESIA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고 그러는 거지?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로렌스와 프레드는 여느 연인처럼 사랑했다. 그들은 아침에 얼굴 위로 빨래들을 뿌리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들만의 비밀스런 리스트를 적으며 그들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로렌스의 30번째 생일날, 그는 남은 생을 여자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로렌스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이 그의 옆에 있어 줘야 할까. 아니면 그를 놓아줘야 할까. 자기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절망적이거나 때론 벅차오르는 그 감정들은 자비에 돌란만의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극대화된다. 로렌스가 처음 여장을 하고 학교 수업에 들어갔던 날, 그 정적 속에는 당혹감, 두려움, 긴장감이 팽배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로렌스의 외모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듯한 한 학생의 질문은 그 정적을 깨뜨리고 그를 압도하던 모든 감정들 또한 시원하게 부서진다. 그리고 당당하게 학교 복도를 워킹하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로렌스의 모습은 당차고, 멋있었고, 자유로웠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와 같았던 이 장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역시 자비에 돌란인가.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를 좋아한다. 나 역시 <마미>와 <단지 세상의 끝>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되었고, 전무한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표현 방식을 좋아하고, 크게 감명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소 러닝타임이 긴 편이라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길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또, 이제 그의 세 번째 작품을 보다 보니, 로렌스가 손톱을 물어뜯는 장면이나 감적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장면들이 너무나 '자비에 돌란'스러워서 순간마다 그가 떠올랐다. 이게 과연 득일까, 실일까.

우리는 뭐 지극히 정상이야?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색과 함께 한다. 로렌스가 프레드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던 때, 프레드는 그를 향한 원망과 함께한 지난 모든 시간들에 대한 회의와 슬픔에 빠진다. 이후에도 그들이 부딪히는 순간에는 늘 파란색 벽지가 그들을 감쌌다. 그렇게 그들은 잠시 헤어진다. 각자의 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낼 때 그들의 주위에는 온통 노란빛이 들어온다. 그들이 리스트를 만들 때 이야기했듯, 노란색은 거대한 자아이자 자존심이다. 나를 넘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훨씬 큰 차원의 자아이기도 하다. 로렌스는 자신의 변화를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프레드는 가족들의 조언을 들으면서도 로렌스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과거로부터 달라지기로 한 로렌스와 불안한 사랑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프레드는 각자의 자존심, 자아에 서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하늘 아래 한계는 없는 거야.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하지만 둘은 함께 하기로 한다. 프레드는 로렌스가 세상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옆에 있어주고, 화장품을 빌려주거나 가발을 사주면서 그를 돕는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을 이끌고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땐, 수 없이 많은 고난이 그들을 힘들게 했다. 로렌스는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식당에서는 모두가 그를 신기한 듯 힐끗 쳐다보고, 프레드는 덜컥 임신까지 한다. 머리를 유난히 질끈 묶었던 프레드는 어느 토요일 한 식당에서 사랑하는 로렌스에게 이상한 사람을 보듯 조롱하는 직원에게 화를 내며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다.


우리는 숨 쉴 자유도 없냐며.


그 순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빨간 머리가 헝클어져 나온다. 그렇다. 그들의 사랑은 빨간색이었다. 유혹이고, 열정이고, 불꽃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빨강은 분노의 색이자 피의 색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로렌스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처럼. 누구보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죽었다. 빨간색에 노란색이나 파란색과 같은 다른 색이 들어와서 죽는 게 아니다. 빨강은 빨강으로 죽는다.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로렌스의 꿈을 짓밟지 않기 위해 배신을 자처하며 그를 놓은 프레드. 그렇게 이별한 그들의 세상에는 온통 하얀색만 가득하다. 어떠한 색도 없다. 프레드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로렌스에게도 그를 잘 이해해주는 여자가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모든 색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그러나 프레드의 머리카락엔 여전히 빨간빛이 물들어 있듯, 그들은 서로를 잊지 않았다. 로렌스의 시는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의 흰 세상에는 조금씩 분홍빛을 밀려 들어온다.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로렌스와 프레드는 뜨겁게 사랑하던 예전처럼 함께 블랙 섬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에게 빨랫감을 얼굴에 퍼붓듯 하늘에서는 형형색색의 옷들이 휘날린다. 빨강, 파랑, 노랑... 우리의 사랑에는 여러 가지 색이 있다. 그 색깔들 만큼 가끔은 뜨겁다가도 슬픔에 빠지기도 하며 때론 화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색들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 우리를 살게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온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다. 그리고 그게 어떤 색이든 중요치 않다.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하지만 그들의 관계에서 쉽사리 접점을 찾지 못했던 로렌스와 프레드는 또다시 이별을 한다. 가을.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계절이 왔다. 가을과 어울리는 갈색은 그들이 말한 것처럼 섹시하지는 않은 색이다. 열렬히 사랑하던 그때의 시절만큼은 그 열정이 사그라들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모든 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머물기보다는 그들은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로렌스는 로렌스만의 삶을, 프레드는 프레드만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사랑을 하기 위해, 그리고 붙잡기 위해 몇 번의 만남을 반복했지만 그들이 끝내 마주한 갈색의 색깔처럼 모든 것을 놓아줄 때가 왔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날의 색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다.

반항이 아닙니다. 혁명이에요.
출처: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1987년부터 1999년까지의 로렌스와 프레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다.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로렌스는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결정은 했다고 한다. 어떤 고난이 앞에 펼쳐질지 알지만 숨 막히는 물속에서 나온 로렌스와, 또다시 무너져버릴 걸 알지만 서로의 사랑을 위해 노력했던 프레드. 아이러니하게도 로렌스는 당당하게 앞문을 통해 세상을 마주하고, 프레드는 뒷문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개인의 자유다. 중요한 건 로렌스와 프레드처럼 일단 발부터 내놓고 보는 당당함,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뜨거움이다. 시선은 늘 있었다. 그 시선을 두려웁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즐기듯이 받아들이거나. 그것은 나에게 달려있다. 성별이 변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그는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로렌스는 여전히 로렌스다. 어떤 이유로도, 그것이 사랑이라도 상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순 없는 법이다.


그래도 잊지는 말자. 한 가지 색만을 강요하던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갖가지 색처럼 내 전부를 주고서도 잃고 싶지 않았던 사랑이 있었음을.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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