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달해본 사람이 되자
잘 지냈어?
너한테 두번째 편지를 쓰기 며칠 전에 우리집 이삿짐이 도착했어. 없으면 없는 대로 너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짐들. 잊고있던, 잊고싶던 나의 과거를 보는 느낌이야. 갑작스럽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이 모든 것이 소멸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이사를 할 때 만큼 정말 내 두 눈으로 나의 과오를 직시하는 경험도 흔치 않아. 내가 저지른 일들, 내가 책임져야 하지.
나의 의식 속에서는 잊혀진 줄 알았던 과거의 일들도 어느 구석에 작은 조각으로라도 남아있듯이, 내가 해온 일들이 과거의 일로만 남아 현재에는 없는 것 같아도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어
버리지 않으면 남아있는 물건 처럼 말야. 그래서 우리는 정리를 하나봐. 현재의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말야. 정리하지 않으면 나처럼 과거가 짐처럼 쌓이는 거지. ㅎㅎ
하루하루 어딘가에 갇힌 듯 답답하다가도 밖에 나오면 맑은 하늘이, 선선해진 기온이 말하지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지나간다.'
집 정리 하는 이야기는 도돌이표만 될 것 같아서 다음 편지에 다시 쓰기로 하고 말야.
다른 이야기를 할까해!
<여행>
한국에서 친구들이 시즈오카에 온다고 하길래 이삿짐 도착 며칠 전 나도 합류하게 되었어.
길 찾기 난이도 극악의 도쿄역 도착.
에키벤은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이라는 뜻인데 이동시간이 긴 기차안에서 에키밴을 먹는 문화가 있어. 이용객이 많고 규모가 큰 도쿄역의 경우는 도쿄역 에키밴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에키밴을 파는데... 도쿄역 = 에키밴계의 아마존. 고를 수 있는게 너무 많아 과부하가 오기 시작함다 냉장보관 되어있어서 차갑게 먹기 좋은 걸로 고름. 연어회 절임 덮밥. 도쿄 시내에 나오면 새삼 사람 많은 걸 느껴.
후지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일부러 예약했는데 후지산 보기가 쉽지 않더군 (구름이 가득)
그래도 사는 곳과는 다른 분위기의 도시풍경 -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맑게 개인 시즈오카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 맡기고 커피를 마시러 나왔어. Rossi 라는 곳.
입구를 한참 찾았는데 다락방 같은 곳을 올라가야 할 줄이야.
마치 개인집을 방문하는 느낌이라 더 조심스러웠지.
“こんにちは.”
“一人です。”
혼자앉기 좋은 자리가 저기 있었군!
이탈리에서 배우셨다는 카푸치노의 진심어린 거품. 좋아하면 티가 난다.
동네 분들의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있는 곳인데 나는 말을 못하니 모닝페이지를 썼지.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건 참 중요해. 나의 생활과 동떨어진 곳에서 느끼는 고립감이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되어줄 때가 있거든.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내가 주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만, 그냥 하다보니 내가 해야할 일처럼 여기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해.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산다면 오직 그런 삶만이 100% 주체성을 가지는 걸까? 다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걸 하라는데 학교를 졸업하면 그런 건 절로 생기는 건 줄만 알았거든.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거라곤 무화과 뿐인데..취향도 그냥 두면 소멸되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린 계속 뭔가를 해야해
새벽 6시의 호텔방
지금 읽고 있는 건 <리틀 라이프>
각자의 혼란과 방황 속에 헤매는 청춘들의 이야기.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기에 더욱 어렵고 절망적인 이야기들.
“그는 홀로 신문 문화면을 훑으며 자신의 미약한 상상력으로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었다.
그럴 때면 세상은 너무나 크고, 연못은 너무나 텅 비고, 방은 너무나 캄캄해 보였다.
-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어느 노래 가사처럼 청춘은 바람새는 창틈에 추워할 수 있는 젊기 때문에 여리고 나약한 존재라는 걸 책에서 잘 보여줘. 그들이 각자 겪는 성장통의 일부가 나의 것이었고 여전히 나도 겪는 것만 같아. 바라건데 나의 고민 속 많은 것들이 막연하고 공허하게 다가올지라도 내가 하는 일이 결국 빛을 밝히고 연못을 채우며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힐 수 있는 일이길.
오늘은 다같이 후지노미야에 가기로 했어. 후지산을 보기위해 가는 건데 차창 너머 후지산은 구름이 가득.
후지역에서 환승해야 했는데 후지산 등반 시기가 끝나서인지 도시가 한적했어.
영업을 시작한 역내 소바/우동 노포
너가 마라톤 할 떄 어느 순간 자기 타협을 마주한댔지? 우리도 사실 구름덮인 산을 보며 끝없이 고민했어.
과연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내 친구들은 그것도 한국에서 부터!)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라면 가는게 맞지.
소도시라 전철, 버스, 모두 배차간격이 길어서 많은 환승과 오랜 기다림 끝에 목적지로 가는 버스로 환승했어. 가는 길 내내 구름 속에 갇힌 후지산을 보며 멋진 후지산 봉우리를 보는 것 보다 목적지에 가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생각했어. 멈추지 않고 돌아서지 않고 도착만 하자.
그렇게 도착한 타누키 호수
근데 정말 거짓말 처럼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어. 그러더니 이렇게 봉우리가 우리를 반겨주었지.
이건 매우 뜻밖의 보상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가다봄녀 이런 보상이 있기도 한 것 아닐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으로” 결승점까지 완주해낸 너가 나의 벗이라는 게 새삼 자랑스럽고 든든해
우리가 해보기로 한 일들 중 지금 보이는 건 구름덮인 산봉우리가 전부인 일들도
어떻게든 결승점에, 우리가 정한 목적지에 둘이 함께 도달할 수 있길 바라며,
도쿄에서 -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