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이 영광의 찰나
안녕!
근처 도서관에서 한국어 책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되었어.
심지어 내가 한국어로 읽고 싶었던 책을 바로 빌려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한걸음에 달려가 바로 도서관 카드를 만들고 빌려보았지.
최근 발견한 나의 소소한 기쁨을 전하며 편지를 시작해 볼께.
지난 편지에서 안해보던 경험들을 해내가는 너를 보며 ‘기특하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라.
너의 안전지대 (comfort zone) 을 벗어나 한 발자국 새로운 곳을 향해 뻗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동감 있는 에너지가 느껴진달까.
역시 사람은 약간의 두려움과 잠깐의 주저함을 이겨내며 한걸음 나아가 해내는 모습에서 나오는 에너지로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너의 지난 편지에서 네가 언급했던 언어교환앱으로 만난 22살의 열정 많은 친구.
우리가 30대 후반이 되어 만나 서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고민의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내 머릿 속에 그려지는 너의 20대도 그 열정많은 22살의 친구처럼 해보고 부딪히 며 천천히 나아갔을 너의 모습이 상상되었어.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 속의 원석을 스스로가 계속 알아봐주는 것. 때론 무기력함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부딪혀도 끊임없이 다독이며 더디지만 계속 나아가기 위한 다짐으로 부터 나만의 원석을 보석으로 만들어갈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어.
오늘도 응원해.
3년전 이맘때쯤 나도 살면서 안해본 짓. 하프 마라톤 도전이 시작되었어. 어쩌다 보니 3년째 포틀랜드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네.
“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 시켜가는 일, 그 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 것은 또 사는 것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많은 러너들이랑 함께 출발선에 서 있을 때 왠지 모를 설레는 떨림과 다치지 않고 잘 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동시에 결승선에 서 있을 모습을 상상하는 두근거림이 있어. 어릴 적 운동회 하던 날 처럼 모두가 기대에 찬!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 너무 좋아.
처음 하프 마라톤 참가한 날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뛰기 시작했는데, 잘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많은 기대와 생각을 하지 않아서 인지 마음가짐은 그 어떤 하프마라톤 보다 용감했어.
나는 느린 템포로 뛰지만서도 10km 정도가 지나면 진정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곤 해.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나약한 마음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지속적인 타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더라.
‘여기서 멈춰 걸으면 안되는데, 속도가 느려지면 안되는데.’ 하는 걱정을 안고 그렇게 뛰다보면 주변 풍경들을 즐기며 뛸 여유가 점점 사라져.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달리면서 볼 수 있는 시시각각 변하는 예쁜 풍경들인데 말이야.
처음엔 예쁜 풍경들을 볼 수 있었던 여유 온데간데 없고 달리다보면 지루한데 속시끄러운 구간이 생겨.
느리지만 그래도 끝까지 뛰었어. 멈출 수도 없었거든.
나약한 마음에 의해 계속 되는 속상한 나와의 타협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스스로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보고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생각하며 한발자국 더 달렸던 것 같아.
올해 하프마라톤은 내가 기대했던 결과보다 훨씬 못한 기록으로 들어왔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노력을 했고, 그래도 해냈다!! 는 작은 성취감을 주는 스포츠야, 마라톤은 정말이지.
아직까지 달리기가 재밌게 느 그 느낌은 잘 모르겠지만 결승선에 들어왔을 때 이 활기찬 에너지와 그리고 응원와준 사람들 그리고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웃음 떄문에 계속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
달리는 동안 고통은 잊은채로 나는 2025년에도 달리고 있겠지.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니까. (ㅋㅋ)
내년에는 ‘you look good! You can do it!!!” 이라고 길거리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의 응원이 힘이 될 수 있게 여유를 좀 갖고 한 발자국 한발자국 즐기며 뛰어보려고 !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 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 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접근하는 것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매년 하프 마라톤에 참가할 때마다 번호표에 나의 강아지들 이름으로 뛰어. 내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짓, 그 순간 순간에 (내가 만들어낸 내 삶의 영광 속에) 그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자랑스러운 견주가 되어 줄께. 사랑하는 나의 강아지들아’
“강아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면, 나는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나 이렇게 서로 특별해질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지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깃들고, 이렇게 서로를 비춰주는 조그만 빛이 될 수 있게 해준 그 힘이, 말도 통하지 않고 종마저 다른 둘 사이에 사랑의 시간이 쌓여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면 그 것은 이미 기적이 아닐까?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비도 천둥도 곧 그치고 어둠은 새벽의 빛으로 허물어 질 거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아침이 늦게 찾아오더라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했다.강아지가 좀 더 내 몸 가까이 파고 들었다. 아주 오랫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 백수린 《다름아닌 사랑과 자유》중 <사랑의 날들>
우리 강아지들은 어떻게 눈으로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신기해..
그들이 눈으로 그리고 온 몸짓으로 그리고 온기로 전해주는 사랑이 마음으로 전해지고 때로는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마음이 벅차 오를 때가 있어. 강아지의 세상은 내가 전부 일텐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 일까 궁금하기도 해.
나의 세상처럼 고민 많은 세상만 있지 않기를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
돌아보면 내가 힘든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되어주었던 존재가 나의 반려견들이었어.
힘든 상황에서도 웃게 해줬고 내가 뭐하나 항시 궁금하고 참견하기 때문에 나의 마음의 문은 닫힐 틈이 없이 항상 열어둬야했었어.
기쁜 일이 있을 때도 함께해 기쁨을 언제나 몇 배로 만들어주는 존재.
나는 우리 강아지들을 통해 ‘사랑한다’라고 말은 못해도 온 몸짓으로 눈빛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자신의 세상을 사랑한다고 표현해주는 것이 얼마나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지.. 반려견들이 주는 온전한 사랑을 배워가는 것 같아.
우리 강아지가 살아가는 그 세상이 나라는 존재인 만큼 모든 순간 순간이 웃음으로 가득채워지도록 문득 드는 무거운 고민들은 잠시 내려놓고 산책하러 나가야겠다.
‘너를 사랑하는 견주가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줄께! ”라는 마음이 전해지도록.
천천히 뛰어 갈 때도, 그리고 천천히 걸어갈 때도 매일매일 저마다 다르게 예쁜 하늘을 보며 작은 순간이 감사해진다.
이 작지만 큰 존재와 나만이 아는 찰나의 영광의 순간들 덕분에!
너의 강아지에게도 안부 전해줘!
10월의 어느날
-포틀랜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