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채워주는 것들
Dear Sunny!
씩씩하게 인삿말을 건네보지만, 사실 연말이 되면 마치 감기처럼 오는 으실으실한 쓸쓸함이 마음 한 켠있어. 일종의 상실감 이겠지?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가버린 시간에 대한..
어쩐지 쨍한 햇빛과 파란 하늘이 나를 더 춥게하는 아이러니, 쌓여가는 낙엽들, 짧아지는 낮 시간을 보며 드는 아쉬움. 그래도 이런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지는 않을 만큼 나름 재밌는 일들이 계속되어 왔지.
시부야
이 날은 날씨가 참 좋은 날이었지.
시부야에는 <Photographs by YOSIGO> 전시회를 보러 갔어.
난 내가 부족한 부분을 넘치게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 매번, 즉각적으로 끌리곤 하는데 요시고의 사진들을 볼 때에도 나의 빈 공간 어딘가가 충족되는 기분이었어.
나에게 없는 그의 미적감각, 색과 형태를 보는 시선.
때에 따라 말끔한 선으로 나누어지는 빛깔로,
혹은 다양함이 질서없이 어울어진 전체적인 모습 그대로.
그가 사진기에 담아내는 것들, 후보정 후 인화해낸 것들은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여러가지 감각으로 해소시켜 주더라고. 멋진 사람의 작업물을 감상하고 나면 그 작품에서 나오는 기운들이 나에게 스며드는 것만 같아. 때로는 물감이 종이에 퍼지듯 서서히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그 물감 속에 내가 빠져버린 듯 완전히 잠식되기도 하고.
집 밖에는 이토록 멋진 일들이 많다.
하치오지
나는 낯선 곳에 가면 미술관부터 찾게 돼.
예전에는 뭔가 그럴싸해보이는 것들을, 뭔지도 모르는 작품들을 한 번은 봐줘야 할 것 같아서 미술관에 조금 으스대는 마음으로 갔던 것 같은데 (지금도 전혀 그런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요즘엔 뭐랄까,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훑어보다보면 “낯선” 이라는 형용사가 조금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여기 한 데 모인 다른 타인들과 같은 작품을 볼 때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존중된다는 느낌.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얼추 비슷한 목표로 이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유대감 비슷한 감정도 들고 말야.
예전 대학교 전공수업에서 공부했던 Spectatorship, 기억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과 개인이 혼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형성되는 “공동체”의식의 유무인데 이건 영화뿐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을 관람하는 공간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나는 미술관에 가서 조금 환영받는 기분을 얻거든. 너가 파웰서점의 베스트셀러 책을 훑어 보면서 “나랑 비슷한 생각 하는 사람들이 많네?” 라고 느낀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My home
헛헛한 기분으로 홀로 지내다보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람들.
슈퍼에서 본 계절한정 초콜렛이나, 잘 때 눈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안대, 귀찮을 때 컵에 뜨거운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다는 양파스프. 평범한 나의 일상 속 평범한 상품들을 우리가 동네친구이던 그 시절처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사무칠 때, 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물건들을 그들에게 보내기로 했지. 나의 그리움을 전하는 일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거든. 우리가 서로에게 쓰는 짧고 소소한 영상 편지도 막상 작업하기 시작하면 부담도 느끼고 미뤄지기도 하지만, 너에게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함께해주어서 고마워.
감기 조심하구, 또 쓸께!
도쿄에서,
- 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