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듀군 Jan 10. 2022

산책, 하세요?

by pixels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따스한 숲길을 걷고 싶은 그런 날. 포화된 머릿속을 비워 상그러운 것들로 가득 채우고 싶은 그런 날. 나는 그런 날이면 꼭 현관문을 열고 산책을 나간다.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된다. 간소히 옷을 입고 문을 열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우리 집 뒷 산을 향해 간다. 뒷 산을 향해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책방이 나온다. 따뜻한 전구들과 알록달록한 책꽂이가 보인다. 마당 앞엔 강아지들이 뛰어놀고 있다. 소박한 시선이 내게 선물을 준다. 그렇다. 나의 산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1km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울창한 숲 속을 마주하게 된다. 포화된 머릿속은 서서히 비워지기 시작하고 자연과 타인의 행동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자연은 그렇다 쳐도, 타인의 행동들은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무결점인 자연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 안을 꾸미고 채워 나가는 타인들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타인의 주인공은 어르신들이다. 유독 그 뒷 산엔 따스함을 지니신 어르신들이 많다. 호쾌하게 웃으시기도 하고, 운동 자세를 공유하기도 한다. 때론, 애완동물의 이끌림에 몸을 주체하지 못하신다. 아기와 함께 손 붙잡고 나온 분도 보이고, 또래들과 함께 나온 분들도 보인다. 그러한 분들의 온기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나의 마음 안에 비로소 여유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여유가 내게 말을 건넨다.


'너도 좀 웃어봐, 그냥 일단 내려놓고 웃어봐'


신기하리 만큼, 그 주문을 외우면 마음속에 웃음이 찾아온다. 정확히 짚어보면 평화 비슷한 것일 수도..
어쨌건 그 웃음은 영감으로 확장되어 다양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뛰놀 수 있도록 돕는다. 평상시엔 할 수 없었던 놀이를 하게 되어 기뻐진 나는 잠시 어린아이가 되기로 자처한다. 생각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휴대폰 메모장을 켜기도 하고, 흘러가듯 날아가게 하고 싶은 생각들은 그냥 수수히 흘려보낸다. 산책을 통해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책방에서 시작한 산책이 점점 끝을 맺어간다. 목적지가 정해진 산책이 아니기에 끝맺음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끝으로 향할수록 더욱 다양한 키워드들로 머릿속이 채워진다. 아이러니하다. 분명 머릿속을 비우러 나온 산책이었는데 머릿속이 다시 채워진다. 근데 확실한 건, 이 채워짐은 기존과 달리 불편함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즐거운 관찰과 놀이를 통해 얻어진 나만의 생각들이 머릿속에 채워진 것이다. 이 생각을 오롯이 품은 채 돌아와 책을 읽거나, 읽었던 책의 내용들을 곱씹는다. 의미 깊게 봤던 콘텐츠들에 적용하기 위해 옮겨 담기도 한다. 그저 머릿속을 비우려 했던 산책은 내게 '웃음, 평화, 놀이, 자유, 생각의 확장' 등 다양한 키워드를 주었다.


나는 내게 많은 것을 품게 해 준 이런 산책이 고맙다. 결코 모든 것을 얻고자 했으면,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내려놓고 싶어 머릿속을 비우자는 생각이었기에,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이토록 산책의 힘은 놀랍다. 그리고 이 생각의 이어짐은 자연스레 스쳐 보았던 책 구절에 다다른 채 마무리된다.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은 산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