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발견
10살과 12살의 꼬마 아이들은 내게 순수함과 따뜻함을 선물해주었다.
그들은 맑았고, 깨끗했다.
돌아오면 잊을 것 같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
지인과의 제주여행 중 성산일출봉을 들렀다.
제주도에선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라 하더라.
머지않은 정상에 도달하면, 성산읍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고 하더라.
힘듦을 마주하고 올라간 그곳엔 힘듦을 덮어 버릴 만한 충분한 장관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우린 얼음물병 하나를 들고 정상으로 향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쉼터에서 쉬고 있는 이들을 보았고, 우린 그저 묵묵히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때였다. 꼬마 남자아이 두 명이 앞에서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헐떡거리는 숨을 간신히 부여잡고 서로를 의지한 채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부모는 어디 있을까? 설마 둘이서 오진 않았을 텐데? 라며 속으로 생각하던 찰나에 아이들이 외쳤다.
'아 우리 엄마는 대체 어디 있지!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몰라! 우리 그냥 빨리 올라가버리자ㅎㅎ'
그저 귀여웠다. 아기자기한 그들의 두 다리를 의지한 채 정상을 오르는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다.
한 아이의 옷은 반쯤 젖어있었고, 답답한 마스크는 그들의 얼굴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마시지 않은 물을 건넸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나의 배려가 되려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에겐 조금 부담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땐 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같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찾아왔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선 채 나는 말을 건넸다.
'애들아 얼음물 좀 마시고 올라가, 많이 힘들지?'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다소 경직된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 지금 같은 시기에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무서운 시기인걸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며 미안함을 표출하고 올라가던 찰나에 아이가 경계심을 풀고 대답했다.
'어.. 혹시 이 얼음물 그럼 저 다 가져요?'
마음 같아선 다 주고 싶었으나,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와 같이 대답했다.
'아니~ 가지는 건 안되고 한 모금만 마셔~ 형이랑 누나도 먹고살아야지~'
아이들은 감사함을 표한 채 물로 머리를 적시기도 했다. 물통의 물은 절반이나 줄었지만, 따뜻한 마음의 온도는 그 이상을 채웠다. 그저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고 되려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자리 잡았다. 물을 마신 아이들이 혼잣말을 했다.
'와, 머리를 물로 적셨는데도 더워, 이럴 때 엄마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이들의 대화 한 글자 한 글자와 지금의 상황들이 또렷이 내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는 아이들, 더운 아이들의 모습, 엄마가 오면 다 해결될 것 같다는 아이들의 생각, 힘듦 가운데서 만난 생수 한줄기.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니 두 아이는 친척관계고, 평일에 수업을 팽개치고 엄마가 제주도 여행을 데려왔다고 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평일에 수업을 팽개치고 온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저 좋을까, 불안할까.
학업에서 벗어나 아이들에게 자유와 여행의 기쁨을 알려주려는 어머님의 마음엔 또 뭐가 있었을까.
학창 시절 그저 학교를 성실히 다니고, 개근상만 받아야 할 것 같았던 나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지금 현재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이 생겼을 거란 생각에 되려 기뻤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나와 지인은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웬걸,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우리 옆으로와 자연스레 앉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우리를 안전한 사람으로 봐줘서 고맙기도 했으며 우리의 행동들이 아이들에게 잘 가닿은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결국 땀으로 범벅된 나와 지인은 물을 마시지 못했지만, 아이들의 웃음과 옆자리에 앉아준 고마움이 부족함을 대신했다.
우린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눴다. 어디서 왔으며, 뭘 좋아하는지. 아이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순수하고 투명한 벽은 내가 볼래야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흘러 아버지 이야기에 다다랐고, 그때의 기억은 성산일출봉에서의 방점이었다.
'이야~ 너 마스크 되게 특이하다. 군대에서 쓰는 색들로 되어있네~?'
'네, 우리 아빠가 군대에서 조금 높은 사람이거든요!'
'이야 자랑스럽겠다. 나라를 지키고 있잖아~'
'저.. 근데.. 이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왜...?'
‘언제든 전쟁 나면 우리 아빠가 제일 먼저 불려 가야 하잖아요, 저는 아직 준비를 못했는데 전쟁 나면 아빠는 제일 먼저 사라질 것 같잖아요. 그래서 이 이야기할 때마다 생각나요. 멋진데 안타까워요..’
아이의 눈에서 진심을 봤다. 그저 내뱉은 말이 아닌, 나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걸까. 아이의 요구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순수했고, 그 마음을 다른 단어로 훼방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묵묵히 들었다. 이전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아이가 풀어놓는 감정의 넋두리들을 다 듣고 나는 작게나마 한마디 했다.
'멋진 아빠와 멋진 아들이네'
화제를 돌렸다. 아이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을 낳고, 그 상상은 결코 아름다운 상상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둘의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제안했다. 둘은 화색이 돈 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포토존으로 향했다.
하나 둘 찰칵~! 아이들은 미소를 지었다. 어깨동무를 했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사람들은 아이를 쳐다봤다. 그래도 괜찮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만의 자세와 그들만의 이야기로 풍경을 채워나갔다. 마치 이 사회를 향해 내비치고 있는 자세와 표정 같았다.
사진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들의 어머님이 도착했다. 아이들은 바로 달려갔다. 엄마의 존재는 대단했다. 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는 형이 물을 줬다는 사실과 우리 사진을 멋지게 찍어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가와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셨다. 우리는 되려 화답했다.
'아이들이 정말 착하고 바르게 큰 것 같아요. 제가 더 힐링되네요 어머님'
이제 우린 간단한 담소를 마치고 내려갈 채비를 하는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가서 저 형 누나들도 너희가 찍어주고 와 얼른!'
'형, 누나!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얼른 서보세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아이의 말을 어찌 거절하겠는가. 우리는 내려와 다정한 포즈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우릴 향했다.
(아니 사실, 그 아이를 향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사진을 찍어주는 아이는 자신의 다리를 찢어가며 우리를 찍어줬다. 우리의 자세가 바뀌기보다, 그 아이의 자세가 더 많이 바뀌었다. 너무나 열심인 아이의 행동에 또 한 번 감사를 표했다. 나를 찍어주기 위해 이렇게 열심인 사람이 있었을까. 나의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찍어주셨을까. 오만가지 감정이 드는 찰나에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뭐라고...'
아이는 자신의 힘든 숨을 골라가며 사진을 찍어줬다. 우리는 연신 감사를 건넸고 사람들은 아이의 행동에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우리는 슈퍼스타였다. 부끄럼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아이의 행동, 지시에 집중했고 어느새 우리는 지휘자의 지휘에 잘 따르는 단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와 우리의 오케스트라였다.
성산일출봉 정상에서의 풍경이 어땠을까, 그때의 공기와, 주변은 어땠을까,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려던 우리의 본래 목적은 바뀌었다. 우린 아이들이 채워 준 시간에 그저 머무른 나그네였다.
하산의 대화는 아이들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또 한 번 우리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아니, 백색의 빛이 찾아왔다.
여기서 끝나면 아쉬웠을까. 먼저 내려가고 있던 우리였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우리를 쫓아왔다. 아이들도 우리가 좋았을까. 보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냥 호기심이었을까.
뭐가 되었건 우리는 다시 한번 더 반가운 재회의 인사를 건넸다. 마치 아이들이 나의 아쉬운 마음을 알아준 것만 같아 너무 고마웠다. 빠르게 내려온 아이들의 숨은 헐떡였지만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보였다.
다시 한번 속으로 외쳤다. '우리가 뭐라고...'
그들은 그저 빠른 발걸음에 먼저 간 사람을 앞서가는 것이 흥미로웠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겐 다시 그들을 볼 수 있어 기뻤다. 그들과 대화를 더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훔치진 못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아이들은 그저 아이들로써 충분한 역할을 해주었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아이들은 내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의 하루는 온종일 아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흰 내일 7-8시 사이 공항에서 떠날 예정이에요'
공교롭게도 우리의 비행시간과 거의 비슷했다.
다시 한번 공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땐 꼭 무엇하나 손에 쥐어주며 보내리라 다짐했다.
자연을 감상하러 갔던 곳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감상했다.
애써 순수한 마음을 본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만이 가진 색채로 그들을 채워나가는 도화지는 그들이어야만 가능했다.
정상만 바라보며 올라가려 했던 곳에
두 아이가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의 무대에 아이들은 그저 비집고 들어온 손님이었을 뿐인데, 그 무대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본래의 목적은 퇴색되었으나 과정 속 피어나는 아리따운 꽃이 그 목적을 감싸 안았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그날의 마침표이자,
지금의 느낌표로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