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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May 04. 2021

사랑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

웹툰 <벌새효과>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인간을 향한 상반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 다른 하나는 '믿을 건 인간밖에 없다'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범죄나 환경파괴 등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명백히 자멸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세상은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인이 박히게 들어서인지 어김없이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신뢰하게 된다.

내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디스토피아 세계가 인간을 향한 상반된 시각을 모두 구현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망해버린 세계에서 인간의 파괴적인 본성을, 엉망이 된 세계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발견한다.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 작품에서 내가 선호하는 주인공은 처음부터 대의를 품고 움직이는 혁명가가 아닌, 그저 자신의 소박한 희망을 위해 행동하는 보통 사람이다.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인 <매드맥스>의 퓨리오사, 동생을 지키기 위해 대신 게임에 참여한 <헝거게임>의 캣니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혀 실험대상이 되었지만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신념으로 고난을 감내한 <브이 포 벤데타>의 발레리가 그렇다. 웹툰에도 디스토피아 세계관 속에서 그저 연인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이 돋보이는 작품이 있다. 육미리즈 작가의 작품, <벌새효과>다.


작품 속 세계의 숨막히는 룰 (<벌새효과> 1화 中)


<벌새효과>의 배경은 인간의 생애 심박수가 현재의 1/2만큼만 할당된 채 태어나는 세계. 인간은 심박수 조절 연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완벽한 순응 구조에서 살아간다. 국가가 제시하는 감정 통제의 가장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소수만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를 누린다. 고등학생인 주인공 채은과 예지는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지만 절제되지 않는 심박수로 금세 들통난다. 감정 통제의 숙련도가 곧 명문대 입학을 결정하는 시대. 학교에서 대입을 미끼로 협박하자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을 포기한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애써 억누른 감정은 졸업식에서 서로를 본 순간 터져버리고 둘은 다시 재결합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버린 예지와 채은 (<벌새효과> 18화 中)


가까스로 재결합했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한 두 사람의 방법은 다르다. 채은은 국가 체제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생각하는 반면, 예지는 사랑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는 장애물로 여긴다. 채은은 사랑을 위해 체제에 완벽하게 순응하고자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완벽한 감정 통제로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은 채은은 대학 입학 이후에도 국가에서 결혼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반면 예지는 사랑을 위해 국가가 요구하는 자격 요건에 맞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제에 의문을 품는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의 근간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예지는 체제 밖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우연히 만나면서 체제가 가진 모순과 부조리함을 알게 되고, 채은을 설득해 시스템 밖으로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국가 체제에 대조되는 반응을 보이는 채은과 예지 (<벌새효과> 27화, 20화 中)


두 캐릭터가 가진 현실성은 <벌새효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채은처럼 현 체제가 요구하는 최고점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거나 예지처럼 불안과 불만이 커져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안주하기 때문이다. 채은은 자신이 가장 잘 해온 방식대로 체제가 원하는 이상향이 되고자 노력하는 전형적인 순응형 엘리트이다. 온전히 자신과 예지를 위한 노력이지만 이런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예지에게 채은은 사랑이 식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서운함을 느낀다. 반면 예지는 적당히 국가가 요구하는 기준점 언저리에 부응하며 살아왔다.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선뜻 행동에 나설 용기나 의욕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에 위화감을 느껴도 채은을 선뜻 설득하지 못하고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불안한 일상을 보낸다. 사회는 대부분 예지와 채은 같은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사람들 덕분에 쉽사리 바뀌지 않고 유지되지만, 해당 계층의 양심에 트리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한순간에 세상이 바뀌기도 한다. 채은은 우연히 국가의 민낯을 보게 된 순간 예지가 한 말을 떠올리며 체제에 처음으로 의구심을 가진다. 예지는 체제 밖 사람들과의 만남이 트리거로 작용해 그들 편에 서서 조력자로 활약한다. 예지의 활약은 조연급 정도에 그친다. 역할 크기가 현실적이라는 점은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같은 이유로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독자로서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인정하고 감정이 터져버린 예지 (<벌새효과> 31화 中)


채은과 예지 캐릭터의 또 다른 매력은 모든 행동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원동력 삼아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두 사람은 유독 서로를 향한 마음을 제외한 부분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두 사람이 원하는 바는 오직 하나, 안정적으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다. 때로는 서운함에 연락을 거절하고 혼란스러움에 상대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지만 채은과 예지의 선택에는 항상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전제한다. 채은이 체제의 부조리함을 눈치 채고 예지가 체제 바깥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혁명의 범위에 편입되는 순간에도 채은과 예지가 걱정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대상은 오로지 서로이다.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목적이 단순하다는 데서 오히려 현실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한치 앞이 불투명한 세상에서 상대를 믿겠다는 마음. 작가가 일견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는 이 커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소박함이 주는 견고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채은과 예지 (<벌새효과> 50화 中)





뤽 베송 감독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에는 아래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      발레리안: I would die for you. (난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

-      로렐린: I did not ask you to die for me. I’m asking you to trust me. (난 날 위해 죽어달라고 한 적 없어. 다만 날 믿어줘)


감독은 위 대사가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대사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연인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불사하기를 자처하지만, 정작 상대가 원하는 바는 날 지켜주고 대신 죽는 것이 아닌 나를 향한 신뢰이다. 이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내가 너를 믿고 갔는데 틀린 길이었다면? 죽음의 길이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나를 지켜준다고 믿은 시스템이 나를 옭아맨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을 직면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무조건 시스템을 벗어나는 길을 선택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실제로 우리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미래가 완벽하게 예상되는 선택지란 없다. 당신이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그리는 세상에 살면서 체제에 의문을 가지게 된 사람이라면 미래 예측가능성은 더욱 낮아지고 압박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디스토피아 세계란 기존 세상이 특정 문제로 붕괴된 후, 문제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명목 하에 통제와 감시가 권력을 뒷받침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정한 삶만이 요구되는 세상에서 그에 반하는 선택을 하기란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행동이다.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한 상황에서 나의 운명을 놓고 최대한 이해득실을 계산하기보다 상대를 신뢰하기로 결정하고 신뢰를 실체로 바꿔 놓는 것. 이것이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보여주고 주장하는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다루는 작품을 볼 때면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든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든, 사랑만이 끝까지 그들의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결말 (<벌새효과> 외전 中)


작품명: <벌새효과>
작가: 육미리즈
플랫폼: 봄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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