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불 Aug 03. 2020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나면 행복할까?

대한민국 청춘 행복지침서, 장강명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

“…그래서 지금 면접관님을 마주하고도 당당하게 저의 생각을 전달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기업을 최상급 플러스로 만드는데 저를 써보십시오.” - 취업정보사이트 ‘saramin’의 자기pr 예시 중


  바야흐로 ‘자기PR(Public Relations의 약자로 ‘홍보’라는 뜻)'의 시대이다. 취업의 문턱에서 생사를 오가며 벌벌 떠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면접관들은 ‘자신이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발표를 해보아라.’와 같은 질문을 서슴없이 한다.


  내가 상품이면 어떤 강점이 있을까 생각하기 이전에, ‘상품’이란 단어를 한 번만 더 곱씹어 봐도 이 시대가 날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가 있다. 누가 상품에게 존재의 존엄성 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쓸모가 다하고 나면, 즉 기업을 최상급 플러스로 만들고 나면 버려지는 것이 ‘상품’의 특징이다. 이 시대는 이제 대놓고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해주겠다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에서 청춘으로 살아남기_한국이 싫어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이런 현실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살다보니 한국이 싫어진 인물이다. 왜 계나는 한국이 싫다, 고 확신 할 수 있었던 걸까. 앞선 ‘상품’과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동물’에 빗대며 이유를 설명한다.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사실 그녀가 원하는 것들은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누리고 싶은 맘이 드는 게 당연한 욕구들이다. 어쩌면 의식주 다음으로 기본적인 것들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욕구를 드러내는 2,30대들은 오늘만 살자는 ‘YOLO세대’, 일과 여가의 균형을 중시하는 ‘워라밸족’ 등으로 불리며 기성세대에게 게으르고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한 신문사에서는 젊은 세대에 확산되는 ‘워라밸 신드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우리가 이렇게 흥청망청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중략) 반면 우리 선배 세대는 물려받은 자산 하나 없이 맨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이런 선배 세대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여가'와 '일' 간의 밸런스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청년 세대가 인생의 가치를 일이 아니라 여가(餘暇)에서 찾는다면 미래가 암울하다. (중략) 자원도 자본도 빈약한 한국 경제로선 생명줄 같은 달러 자산을 계속 '재투자'하며 열심히 불려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출처]_김홍수, 조선일보, <걱정되는 ’워라밸‘ 신드롬>, 2018


  마치 울고 있는 아이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묻지 않고 '나 때는 말이야, 더 힘들었어. 그 정도는 견뎌내야지.'라고 말하는 모습 같다. 우리가 우는 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고? 이거야말로 완전히 나를 상품취급 하겠다는 것 아닌가. 심지어 내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먹고 튀자' 식의 대우. 상품이나 동물이나, 생존 이외의 욕구는 사치다. 그녀에게 이런 한국사회는 일종의 ‘사육장’이었다.


[출처]_만화가 '잇선'의 인스타그램(@itsun_)


행복이란 무엇인가_첫 번째 출국

  계나는 이런 한국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호주로 떠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소위 말하는 '헬조선'에서 탈출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나의 친구들은 그녀를 두고 '외국병'에 걸렸다며 비아냥 댄다. 사실 나도 그동안 한국을 피해 외국으로 나가 살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계나의 친구들처럼 ‘외국병’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독일에서 7년을 살아서인지 ‘어딜 가나 살기 어렵다, 외국가면 심지어 동양인이라는 핸디캡까지 있다, 환상이다.’라는 같잖은 조언들을 하곤 했다. 실제로 계나의 첫 출국은 도피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던 그녀가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면서까지 대체 무얼 얻고자 호주에 왔던 것일까.


  그녀 자신도 확신을 갖지 못해서인지 ‘엄친아’ 남자친구 '지명'의 청혼과 같은 고백으로 이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지명은 이내 꿈꾸던 기자시험도 합격하고 계나는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게 되는데 정작 그녀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 또 한국에서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지명의 행복 역시 그녀에게는 고통의 굴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힘겹게 얻은 직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돌아와 기절하듯 잠드는 지명의 날들. 그의 모습 속에선 계나 자신이 원하던 행복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익숙한 불행에 가깝다. 첫 번째 출국의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다면 이번엔 과연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녀는 두 번째 출국에 나선다.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_두 번째 출국

  

  그녀는 원하던 행복을 두 번째 출국 때에 비로소 ‘개념화’ 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금융회사 출신(?)답게 행복을 돈에 비유하는 데 행복을‘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신의 이자가 되게 높아.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중략) 나는 지명이도 아니고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현금흐름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 끼나 먹고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는 걸


  계나가 갑갑함을 느꼈던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 불리는 현금흐름성 행복을 추구하다보면 철없는 젊은이로 취급받기 마련이고, 실제로도 현금흐름성 행복이 쉽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것들은 그저 사치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자산성 행복을 얻기 쉬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자산성 행복을 쥔 지명이 같은 경우 앞서 말했다시피 ‘엄친아(엄마친구아들의 줄인말로 완벽한 남자를 일컫는다.)'이다.


  집도 잘 살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던 지명조차 자산성 행복을 위해 수많은 땀과 시간을 투자했는데 집도 머리도 얼굴도 평범한 사람들은 거의 평생을 바쳐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계나는 무작정 한국을 떴던 것이다. 어떤 행복도 자신이 얻기에 부적합한 사회였기에.


  계나는 현금흐름성 행복에 대해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말 우스운 게, 사실 젊은 애들이 호주로 오려는 이유가 바로 그 사람대접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 접시를 닦으며 살아가도 호주가 좋다 이거지. 사람대접을 받으니까(중략)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해야 해.

  즉 계나는 사람대접을 받기에는 자산성 행복보다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건 아마 자산성 행복은 앞서 말한 듯 존재 그대로의 가치보다는 목표를 달성하기에 얼마나 유용하느냐, 즉 쓸모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결국 자산성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가다가 그 행복을 달성하고 나면 내가 존재를 잃고 살고 있었구나,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자산성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산성 행복은 그 길로 가는 과정보다 목표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잃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산성 행복만이 진짜로 가치 있는 행복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출처]_네이버 웹툰 ‘대학일기-225화 ‘소확행’편 중 한 장면. ‘현금흐름성 행복’을 좇는 청년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호주에서 살면 행복할까?


  호주에서 살기로 한 계나는 이후로 과연 행복할까. 지명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재인과의 만남으로 확실히 현금흐름성 행복은 어느 정도 보장 될 것이다. 그러나 계나의 행복론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다.


  그녀의 가치관이 주로 현금흐름성 행복에 기울어있긴 하지만, 남아있는 자산성 행복의 목표를 보자면 아직까지 '신분상승'이 가장 상위에 있다. 이 목표 역시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던 한국사회라는 우리가 주입해 놓은 행복의 답이다. 그녀가 말했듯 본인이 자산성행복과 현금흐름성행복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람이라면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산성 행복의 목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한 한국이라는 사육장을 벗어나더라도 어딜 가나 그녀가 있는 그곳 역시 또 하나의 축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분명 해외로의 탈주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주인공의 호주행은 한국의 답답한 현실을 고발하는 장치일 뿐 결국은 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 책 전반에 걸쳐 계나의 행복론을 설파하였던 것이다.



나만의 크고 확실한 행복 찾기


  한국에서도 청춘이 행복하기 위해, 결국 해야 할 일은 '나만의 크고 확실한 행복 찾기'인 것 같다.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확실한 행복이어서는 안 되고 나만의 행복일 것, 작은 행복도 좋지만 자산성행복도 중요한 사람이라면 되도록 크게 보고 행복할 수 있는 것, 또 이것을 할 때 내가 ‘확실히’ 행복하다 싶은 것. 이 모든 행복의 조건을 검토해보았을 때 그곳이 호주든 아프리카든 한국 어디든 떠나도 되는 것이다.


  계나는 이런 점에서 아직 자산성행복을 갖기 위해선 세 번째 출국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장강명 작가가 정성들여 써놓은 이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3번의 출국이라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고 행복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


  많고 많은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청춘이 행복한 사회가 올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서 말 한 대로 더디더라도 한 발짝씩 내밀 수 있는 내 길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그 길이 한국이라는 사회가 주입한 길인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길인지를 명확히 하며 말이다.


  그리하여 한국에도 더 이상 자기를 presentation 해야 행복한 시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presence 해도 행복한 새로운 자기pr의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067



매거진의 이전글 분노에게 끌려 다닐 때 꺼내 봐야 할 지침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