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중학생부터 대학생 자녀까지 두었지만, 30대 후반에 결혼한 나는 11살과 8살의 어린 자녀가 있다.
유난히 내 아이들은 엄마 껌딱지다.
외출은 고사하고 음식물 버리러 아파트 쓰레기장 하나 맘 편히 나가질 못하게 한다. 코로나19로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일상생활이 더욱 숨 막히고 고단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허락되어 나간 절친 모임에도 5분에 한 번씩 걸려 오는 아이들 전화에,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어서, 모임 자체를 포기할 때가 많았다. 어떨 땐 ‘전화받지 말까?' '집에 들어가지 말까?’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나에겐 한 가지 철칙이 있다. 내 어린 기억 속, 엄마의 모습 때문이다.
내가 7살쯤, 아빠와 크게 다투신 엄마가 일생일대 첫 가출을 했다.
난 그 사실도 모른 채 동네 친구들과 해가 지도록 놀고 있었다. 저녁밥 먹으러 하나둘 집으로 들어가자 심심해진 몇 명의 아이들은 놀이터로 향했다. 이미 어둑해진 그네에 앉아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둘째 언니였다. 언니는 고개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언니 왜 울어?”
“너 엄마 집 나간 거 모르지? 우리 이제 엄마 영영 못 볼지도 몰라.”
그제야 하루 종일 엄마가 보이지 않았단 걸 알았다.
어린 나는 울면서 잠이 들었다.
새벽, 여느 날처럼 잠결에 “엄마!” 하고 찾았다.
그런데 꿈처럼 “오야 내 시끼” 하며 엄마가 나를 꼭 안았다.
그 밤, 나는 엄마 품에서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날 힘들게 할 때가 많다.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온종일 쓰러질 만큼 버겁게 할 때도 많다.하지만 잠결에 나를 찾을 때 언제든 “오야 내 시끼” 품어줄 수 있도록 제시간에 들어가야 한다는 철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