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유 Jan 28. 2023

다르지만 언제나 계속될 이야기

우리에게 찾아온 기적

돈 잘 쓰는 서울 토박이 여자와 돈만 잘 버는 깡촌 출신 남자. 태생도 성격도 극과 극인 남자. 취미도 습관도 전혀 다른 남자.  

나는 그런 남자와 결혼했다.




서른여덟, 비혼을 꿈꾸던 내가 결혼 결심하게 된 건 남편의 경제력이 컸다. 남편은 서울시 공단에서 운영하는 공연장 및 공원 내 굿즈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었고 매년 전자입찰로 십 년 넘게 판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돌 공연, 연말 공연, 다양한 축제 등 큰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꽤 큰돈을 가져다줄 만큼 남편은 벌이가 좋았다.


일의 특성상 주말과 공휴일, 행사가 있는 날에만 일했던 남편은, 평일에는 업계 친구들과 등산, 낚시, 여행 등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호텔리어로 밤낮없이 근무하는 아내에 대한 배려 없이 총각 때처럼 행동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의 친구들과 내가 친해지길 원했다. 하지만 많은 고객을 상대하느라 나는 지쳤고, 쉬고 싶었고,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투는 일이 많았고 그럴수록 남편의 귀가는 늦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인터넷 쇼핑을 했다. 취미도 생활 패턴도 전혀 다른 남편과 각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며 골은 깊어졌다.


행사가 끝나면 남편은 사과의 의미로 몇백만 원이 들어있는, 돈 봉투를 내밀었다. 심란하고 분노하던 마음은 큰돈 앞에서 무너지고 며칠은 버틸 맛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 못한 불운이 찾아왔다. 결혼하고 두 번째 맞는 전자입찰에서 남편이 떨어진 것이다. 남편 일을 헌신적으로 돕는 후배가 있었다. 내가 봐도 성실하고 믿음직한 동생이었다. 술자리에서 후배는 예상 입찰가를 넌지시 물어봤고 그 금액보다 현저히 낮은 금액을 써 내 입찰에 성공했다. 남편은 일자리를 잃은 것은 물론, 몇 톤에 달하는 상품 보관 창고비와 굿즈 계약 선수금을 고스란히 날렸다.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 생업을 잃었다는 절망감에 남편은 거의 폐인 상태가 됐다.


많이 울었다. 남편이 안쓰러워서, 앞으로의 삶이 막막해서. 어떻게든 살 방법은 있을 거라고 위로하고 격려도 해봤지만, 남편은 자포자기한 듯 소용이 없었다. 방안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밤새 울며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정신이 바닥이니 몸살이 온 듯했다.


‘몸살이 단단히 왔나 보네. 미열도 있고...’

그런데 몸이 좀 이상했다. 불현듯 드는 생각에 임신 테스트를 했다. 선명한 두 줄이었다. 테스트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2년이 다 되도록 생기지 않던 아기였다. 불임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배란 유도 주사를 배에 직접 놓으며 임신을 기다렸다. 한방병원에서 한약을 지어먹고 뜸, 침 치료도 꾸준히 받았다. 노산이라 더는 늦출 수 없어, 다음 달 인공수정에 들어가기로 했었는데...


2011년 12월 24일. 가정을 포기하고 싶었던 절망의 순간, 기적처럼,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아이가 우리를 살렸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 아이가 지금 열두 살이 됐다. 그리고 세 살 터울의 귀여운 여동생과 함께 우리는 4인 가족이 됐다. 남편은 학교 전공을 살려 이직한 곳에서 작년, 팀장으로 승진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져 삶의 태도도 달라졌다.  


4년을 한결같이 구애하던 남편을 번번이 쌀쌀맞게 퇴짜 놓던 내가 어떤 인연으로 결혼하게 된 것일까.

늦게 하는 결혼인 만큼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던 욕심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을 사랑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소박함, 둥글게 살아가는 유연함, 사랑 표현을 아끼지 않는 따뜻함. 나는 남편의 그런 점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르기에 끌려서 시작된 인연. 우리에게 찾아온 기적은 어쩌면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여전히 겹치지 않는 의견들로 충돌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점쟁이가 그랬다며. 연상하고 결혼하면 잘 산다고. 뭐든 잘 풀린다고. 그러니까  누나만 믿고 따라와!”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가장 가엾고 쓸쓸한 11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