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들어아빠는마른기침을자주 했다.일주일 동안 입원해목의 이물감과 가슴 통증, 소화불량에 관해다양한검사를 했지만 뚜렷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아빠는퇴원 후에도 숨이 차고 속이 좋지 않아 잘 드시지 못했고 몸은점점 쇠약해졌다.
7월 13일은아빠의 여든두 번째 생신이었다.
3월 친정가족 여행으로 진해 군항제를 다녀오면서 아빠 생신에는 부산 여행 가자고 얘기했던 터라다녀오자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빠는
"여행보다도 꼭하고 싶은 게 있다. 아들이 하는 가게에서 동네 어른들한테 식사대접 한번 하고 싶구나. 더 늦기 전에."
부모님은지금 동네에서 50년을 넘게 사셨다.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와 오랜 기간 힘들게 장사하며 나름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구멍가게 시절부터아빠는돈이 없는 아이에겐빵을 주고 폐지 줍는 노인에겐팔고 남은 부식 거리를나눠주고 미화원아저씨에겐 막걸리를 대접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들의외상값이쌓여갔다.떼인 돈도 많았다.아빠는베푸는 걸 좋아했고 정이 참 많았다.아빠가 가게에 있는 시간에는 늘 사람이 들끓었다. 마트를 그만둔 지 십 년이 넘은 지금도 아빠를찾는 사람이 많았다.
45인승 버스를 대절해어른들을 모시기로 했지만, 생신날아침부터폭우가쏟아졌기때문에혹여나 참석하는 분들이 적으면 어쩌나 그래서 아빠가 서운해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먼저 도착한 동생네 가게에서 가족들과버스를 기다렸다. 걱정과 달리빈 좌석 하나 없이 꽉꽉 채운 어르신들과 환하게 웃으며 내리는 엄마아빠를 보니 너무 감사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버스앞에서 우산을 씌어 드리며다 내리실 때까지 꾸벅꾸벅 인사했다.
맛있는 음식과 자녀들이 준비한 유쾌한 이벤트로
연신 분위기는 최고였다. 아프셔서그간식사도잘 못하셨던 아빠도 그날만큼은 맛있게 많이 드셨다. 오 남매 크는 모습을 세월로지켜보신 동네어르신들이 입을 모아 "고맙다 장하다 효자다."말씀해 주시니몸 둘 바를 몰랐다.아빠가 원하시긴 했지만,이제라도해드릴 수 있음에벅찬감동을 느꼈다.자리해 주신어른들께도깊이감사드렸다.부모님과어르신들은버스를 타고 동네경로당으로 가서 한바탕 2차 뒤풀이를 즐겼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날만 있길 바랐다.
이틀 뒤 아빠는 극심한 복통으로 입원했다.
결국 그날의 생신 식사대접은 아빠의 마지막 소원이자 50년 지기 어른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