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간병 일지- 아빠와의 가장 긴 여행 3.
58kg였던 아빠 몸무게가 항암 3주 만에 46kg가 됐다. 살 빠지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던 아빠는 병명을 처음 들었을 때 보다 더 절망한 얼굴이었다.
아빠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수치가 모두 낮아 매일 세 종류의 수혈을 받았다. 그럼에도 호중구 수치는 점점 떨어져 결국 1인 병실로 격리됐다. 감염에 취약한 환자를 다른 환자들과 분리시키는 역격리 조치였는데 아빠 면역력이 그만큼 바닥이었다. 병실에서도 둘 다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을 더 자주 하고 저균식 식사를 하고 밥도 따로 먹었다. 오염된 균이 들어올까 병실 문은 굳게 닫아놓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파란 비닐 옷과 얼굴 가리는 투명 챙모자, 비닐장갑을 끼고 출입했다.
구역감 때문에 식사도 잘 못하는 아빠가 그나마 좀 드시는 건 단호박죽, 수박 그리고 식혜였다. 호박죽과 식혜는 떨어지기 전에 사다 놓았고 수박은 파인애플이나 샤인머스캣, 방울토마토등과 번갈아가며 병원 근처에 있는 과일 도시락가게에서 배달시켰다. 까탈스러운 아빠도 그 집 과일은 달고 싱싱하다며 좋아했다.
8월 말, 금요일 밤이었다. 아빠가 으슬으슬 춥다며 이불을 한 장 더 덮어 달라고 했다. 찌는 무더위에 에어컨까지 껐는데도 아빠는 경기하듯 떨었다. 체온을 재보니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 있었다.
조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해열제를 맞고도 열이 떨어지지 않자 이불을 젖히고 얼음주머니를 아빠 이마와 겨드랑이에 끼웠다. 아빠가 소스라치며 당장 치우라고 화를 냈다. 나는 열이 나면 위험하니 조금만 참으시라고 했고 아빠는 죽을 것 같다며 이불 좀 덮어 달라고 악을 썼다. 얼음주머니를 가슴에 올리고 아빠를 힘껏 안았다. 이가 부서져라 떨고 있는 아빠 몸은 아기처럼 작았다.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빠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열도 서서히 떨어졌다
한고비 넘겼다 싶었는데 산소 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아빠 호흡이 가빠졌다. 혈압도 계속 떨어졌다. 콧줄에서 산소마스크로 바꾸고 산소 주입량을 높였다. 다리를 높게 하고 온몸을 주무르며 혈압이 올라가길 기다렸다. 금요일 밤이고 워낙 위급 상황이라 중환자실 당직 의사가 수시로 와서 봐주었다. 의사가 혈압이 더 떨어지면 저혈압 쇼크가 오기 때문에 승압제가 있는 중환자실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명 치료에 동의하냐고 내게 물었다.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아빠를 살려야 한다는 것. 후들거리는 손으로 연명치료 동의서를 작성했다. 아빠에게 당장 필요한 치료는 동의하고 기관삽관이나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은 선택하지 않았다. 그동안 가족들과 얘기 나눈 것도 있고 암 환우와 보호자들이 활동하는 카페에서 눈물 흘리며 읽었던 글들이 큰 도움이 됐다.
갑작스러운 상황을 혼자 감당하기엔 두렵고 무서웠다. 새벽 두 시, 남동생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늦은 시간이지만 상황을 알렸다.
중환자실에는 절대 안 간다며 아빠가 집에 가겠다고 했다. 나가면 바로 돌아가신다는 의사말에도 아빠는 막무가내였다.
"이러다 쇼크 온다잖아요. 혈압만 오르면 중환자실에서 금방 나올 수 있대. 우선 살아야 할 것 아니야. 아빠, 제발."
아빠 상태가 급작스럽게 나빠졌는지 당장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아빠 침대가 벌써 병실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빠, 괜찮을 거니까 걱정 말고 치료 잘 받고 있어. 내일 면회 올게. 아빠 힘내."
중환자실 문이 닫히기 직전, 급하게 아빠 사진을 찍었다.
아빠가 중환자실로 가셨기 때문에 병실을 빼야 했다. 아빠 짐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도 켜지 않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문득 중환자실 앞에서 찍은 사진이 떠올라 휴대폰을 열었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진 듯 나는 목놓아 울었다.
확대해 본 사진 속 아빠 눈에는 흐르지 못한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망울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