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간병 일지- 아빠와의 가장 긴 여행 2.
아빠는 호흡기 내과에서 혈액 종양내과로 전과가 됐다.
아빠의 병명을 알고 난 뒤 가족들의 의견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국내 빅 5 병원에 가서 다시 진료를 받을 것인지, 림프종으로 알아주는 성모 병원으로 전원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집에서 5분 거리인 지금의 대학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할 것인지를 두고 말이다. 아빠와 며칠 있어 본 내 의견은 옮기지 말자였다. 거동 자체가 힘겨운 아빠 상태로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사받는 것은 무리였고 이동 거리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병원이 심적으로도 아빠한테 편할 것 같았다.
림프종 항암은 거의 표준 치료이기 때문에 아빠의 체력을 먼저 생각했고 퇴원 후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에도 재빨리 병원에 올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5인실 창가 쪽 자리는 넓고 환했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은 얇은 블라인드로 가리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아빠는 어둡고 답답하다며 그마저도 내리지 말라고 했다. 지글지글 등살을 태우는 한낮의 직광도 아빠와 함께라면 좋았다. 아빠의 얼굴을 닦아주고 로션을 발라주고 머리를 빗기고 퉁퉁 부운 다리를 주물렀다.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아빠의 통증이 조금이라도 없어지길 기도했다. 아프시더라도 오래오래 아빠를 보고 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항암 전날, 부작용 관한 유의 사항을 설명한 의사가 가고 나서야 아빠가 내게 물었다.
"지금 뭐라는 거냐? 항암주사라니, 그럼 내가 암이란 말이냐?"
"아, 아빠 잘 몰랐구나. 림프종이 혈액암인데 수술은 안 되고 항암주사만 된대. 그래도 완치가 잘 된다니까 걱정 말고 나을 생각만 하자. 응?"
통증 때문에 아빠는 림프종이 뭔지 어떤 병인지 흘려듣다가 항암주사라는 말에 몸 상태를 알았는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이내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빠의 몸무게는 58kg이었다.
1차 항암은 연세와 체력을 고려해 성인 남자의 70%의 항암량으로 시작했다. 정상 속도보다 천천히 맞으면서도 심박수가 수시로 올라 잠시 쉬었다 다시 맞기를 반복, 2시간이면 맞는 주사를 아빠는 8시간 넘게 맞았다.
항암 주사 후에도 아빠의 가느다란 팔엔 매일 6가지가 넘는 수액이 혈관으로 들어가다 수시로
붓고 막혔다. 아침저녁으로 피검사해야 하는데 점점 약해지는 혈관 찾기에 간호사들은 애를 먹었다. 아기들이 맞는 가장 작은 바늘을 써도 혈관이 굳어있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피를 뽑기 위해 12번 찌른 날도 있었다. 아빠의 양팔은 이미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엉망이 됐다. 급할 땐 발목에 놓기도 했지만 퉁퉁 부어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케모포트 시술받기로 했다. 쇄골 근처 안에 기관을 삽입해 그곳으로 모든 수액을 공급받고 채혈도 가능하다. 바늘만 빼면 다음 항암 때도 쭉 쓸 수 있다니 아빠가 덜 고생스러울 것 같았다. 30분이면 끝난다는 시술을 아빠는 한 시간이 넘어 끝이 났다. 혈소판 수치가 낮아 지혈이 안 되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했다.
아빠는 4시간에 한 번씩 맞는 진통제로도 통증이 잡히지 않았다. 밤새 끙끙대며 한숨도 못 주무시는 아빠에게 종일 맞는 모르핀이 처방됐다. 혈관 고통과 전신 통증에서 벗어나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 아빠는 입원하고 처음으로 웃었다.
마약, 모르핀, 환각이라는 부정적 생각에 걱정이 많았지만 아빠가 덜 아파야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르핀을 맞으면서 아빠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잠을 푹 자니 살 것 같다며 내내 단잠에 빠지셨다. 밥때가 돼도 비몽사몽 정신이 없어 자꾸 끼니를 미뤘다. 난 중간중간 어떻게든 드시게 하려 애썼고 아빠는 잠에 취해 점점 입맛을 잃었다.
식욕부진, 구토, 메스꺼움, 오한, 부종,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수치 저하 등 아빠는 갖가지 항암 부작용에 시달리며 모르핀으로 버텼다.
문제는 섬망이었다.
"죽은 네 할머니가 흰옷 입고 나보고 따라오란다."
"냉장고 위에 저 검은 남자는 누구냐?"
"침대 밑에서 검은손이 나와 옷을 잡아당긴다."
천장에 있는 작은 얼룩을 보고 사람 얼굴이라고도 했다. 아빠가 자꾸 헛것을 보고 이상한 말을 했다.
친정집에서 한번 겪어서인지 그렇게 놀랍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누가 그래? 어떤 놈이야! 감히 우리 아빠한테. 이리 와, 너 죽을래?"
침대 밑에 손을 넣고 휙휙 저으며 몰아내는 행동을 취했다. 냉장고 위에 놓인 회색 호흡기 치료기계도 바닥 안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아빠 손을 잡으며
"이젠 없어. 또 나타나면 말해. 내가 다 쫓아낼게. 아무 걱정말고 주무세요."
아빠가 맞잡은 내손을 꼭 쥐며 안심하듯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