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서로 오가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양쪽이 서로 의심하지 않으면 최선의 관계가 되겠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한쪽만의 믿음이란, 대개 공허함으로 끝나는 법. 나는 믿는데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으면 내 마음이 다치고, 그게 싫어 믿음을 주지 않으면 내가 다칠 일은 없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마련이다. 마치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비슷한 맥락이랄까.
믿음의 공허함을 경험해 본 사람일수록 자기 방어기제는 더욱 견고해진다. '서로 믿는다'는 건 그래서 더욱 어려워진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서로가 확인한 뒤의 믿음은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진짜배기 믿음을 경험한 이는 과거의 잘못 끼웠던 단추를 다시 끼울 용기를 얻게 된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정말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가치관을 건드리지 않는 한.
정영태 팀장과 휘영은 모두 그걸 아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다시 한번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고는 하지만, 영태의 한 마디는 휘영에게 크나큰 힘이 됐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휑한 망망대해 같던 복잡한 생각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등대를 발견한 기분. 그 등대는 머릿속에 짙게 드리워 있던 안개를 뚫고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일단 부딪치고 보는 거야. 그러다 보면 다른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불안한 듯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뚝 멎는다. 생각의 안개가 걷히자 마음이 한결 밝아진다. 그러자 행동은 거리낄 것이 없다. 휘영은 곧장 신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휴대폰 주소록에서 이름까지 검색해 놓은 상태. 눈을 딱 감고 발신 아이콘을 누른다. 신호음이 울리나 싶더니 두어 번째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응답이 온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아, 까…깜짝이야. 뭐예요? 내 전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침 휴대폰으로 게임을 좀 하고 있었거든요.]
"아…… 네……"
엉뚱함이 물씬 느껴지는 대답. 잘 쉬고 있는 병실에 찾아와 살벌한 헛소리로 심각한 상황을 연출한 장본인 치고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겹쳐진다.
[어디 보자~ 먼저 연락을 주신 걸로 미루어 보아 용건은 대략 짐작이 가긴 합니다만… 모쪼록 이런 문제는 확실히 해둬야 탈이 없는 법이죠. 그럼, 제안을 승낙하신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어…… 잠시만요. 그게… 그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게 좀 있는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에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한테는 나름 중요한 일이라서."
[흠…… 뭐, 그러시죠. 어차피 요즘은 별로 바쁘지도 않고… 오늘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니까요. 시간과 장소 정해주시면 게임 좀 더 하다가 맞춰서 가겠습니다.]
"저녁식사 해결하시고 오후 8시 즈음에 경찰서 근처로 오시겠어요? 간단하게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는 걸로 하죠. 가만…… 그러고 보니 장소는 굳이 안 정해드려도 되지 않아요? 저번에 보니 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신 거 같던데."
[아, 그거요? 평상시엔 안 합니다. 그땐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거죠.]
"……대체 어떤 사정이 있으면 남의 사생활 정보를 맘대로 뒤적일 수 있는 건가요? 무슨 국정원 관계자라도 되시나 봐요?"
[아, 제 위에 계신 분 성격이 좀 급하신 편이라서 말이죠. 하하하. 뭐,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이따 뵙도록 하죠.]
대화는 의외로 정상적(?)으로 끝났다. 현우는 첫 만남부터 찰진 욕설을 한 바가지 먹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둥글둥글한 태도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하긴, 첫인상은 꽤 좋은 편이었지. 크리티컬한 헛소리 한 방으로 이성을 잃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서 문제지만. 그나저나 자리는 만들었으니……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네. 일단은 그 조직이 뭐 하는 곳인지, 이 인간이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캐 봐야겠어. 이래저래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막상 일을 벌여놓고 나니 묵직한 부담감이 한 발 늦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 엎질러진 물. 휘영은 수첩을 펼쳐 알아내야 할 것들을 차분히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캐모마일 차 한 모금을 마신다. 지난번 동네 카페에서 지홍을 만났을 때 멋대로 주문해 줬던 그 차가 은근 취향에 맞았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또 혈압 올릴 만한 말을 한다면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아주 살짝 있었다. 마주 앉은 현우는 무난하게 얼그레이를 골랐다.
"먼저, 지난번에 그…… 좀 과격했던 언행은 사과하도록 하죠. 제가 경솔했어요."
"음? 아, 그거요?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나름 각오하고 지른 거거든요. 현직 경찰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성적인 대화를 기대할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닙니다. 주먹 안 날아온 게 다행이죠."
"……그걸 아시면서 그랬다는 건가요? 사과하려던 말이 쏙 들어가는 대답이네요."
"제 입장에서는 그냥 이야기의 전후관계를 좀 바꿨을 뿐입니다. 마무리까지 예상했던 대로 깔끔하게 됐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유감이군요."
각오는 했지만 시작부터 살짝 열이 오른다. 잽싸게 차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긴 뒤 천천히 호흡을 고른다. 아니, 그게 앞뒤를 바꿔도 될 이야기인가? 이 인간은 연역법과 귀납법의 용법도 구별할 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역시, 보통 수준을 넘어선 똘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도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훌륭한 표본이라 하겠다. 더욱 기가 찬 건, 욕먹을 걸 알면서도 그 상황에서 이야기의 마무리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는 점. 꼴에 완벽주의 경향도 있는 게 분명한, 또라이 완전체다.
휘영은 머릿속으로 신현우라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계속 수정해 나간다. 깍듯해 보였던 첫인상? 이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얼굴만으로도 빚어질 수 있는 피상적 관계에서 무난한 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는 걸. 그 뒤에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4차원, 좀 더 나아가면 어디로 튈지 모를 미친놈 기질이 다분한 타입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건네받은 명함이 가짜라 할지라도, 그동안의 대화로 미루어봤을 때는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 속해 있다는 정황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속해있는 조직에서 이 사람은 어느 정도의 위치일까? 또, 그 조직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을까? 이건 중요한 문제다. 미친놈 하나라면 어떻게든 막을 방법이 있겠지만, 만약 비슷한 수준의 증상을 보이는 미친놈 여럿이라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시너지를 낼 수도 있는 법이니까.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뜸을 들이는 척, 천천히 차 몇 모금을 더 마시며 머리를 굴린다. 그동안의 수사경험에 이 사람의 언행 패턴을 대입해 본다. 조직에서 이런 대책 없는 식의 일처리가 가능한 위치는?
'나라면 절대 이런 시한폭탄 같은 인간을 곁에 두지 않겠지만… 그건 그거고. 어쨌거나 뭐가 됐든 절대 말단일 리는 없어. 말단이었다면 위에서부터 내려온 지시를 곧이곧대로 수행하려 할 거고, 저런 무모한 짓거리를 할 리가 없겠지. '
말단 행동대원들에게는 대개 판단하고 자시고 할 일이 없는 단순 명료한 임무가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그들이 앞뒤 계산을 제멋대로 하며 움직인다면? 그 조직은 답이 없다. 언제가 됐건 자멸할 운명이다. 실제로 말단 조직원의 돌발행동으로 단서를 얻어 잡아넣은 폭력조직도 꽤 있었으니까.
만약 중간 관리자급이라 해도 말단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맡게 되는 일 자체가 다르고, 여기서부터는 약간씩의 판단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어찌 됐거나 크게 복잡한 일은 주어지지 않는다. 길을 선택할 수 있을 뿐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고 할까. 물론, 개인의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뒷일을 책임지고 수습할 능력과 자격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파격적인(?) 화법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방식이다.
'그 정도 능력과 자격이 있는 이라면 애초에 단순한 중간관리자 정도로 남겨두진 않았겠지.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만나봤던 폭력조직들을 기준으로 한 거긴 하지만… 모양새를 보면 이 인간들도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아.'
그렇다면, 제일 위쪽의 의사결정권자일까? 그러고 보니 그날 휘영이 분노를 드러낸 뒤 잠깐 사이에 보여줬던 위압적인 모습과 금방 되찾은 여유로움. 그 정도 카리스마와 감정 컨트롤이라면 한 무리를 이끄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오늘 약속을 잡기 위한 통화에서도 현우는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거리낌 없이 언급했다. 그렇다면 최측근 참모 정도로서 어떤 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런 미친놈이 최측근 참모라고? 정말?
'하긴… 본래 누가 봐도 아니다 싶은 길을 개척하는 능력이랑 그걸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의 또라이 기질은 어느 무리에서나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법이지. 특히 이 나라처럼 무난한 길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환경에서라면 더더욱…… 하아…… 창조경제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들이밀었으면 대성했을지도 모를 타입이야.'
첫 대화 이후 한참 동안 찻잔만 홀짝거리며 침묵이 이어지자, 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뭔가 생각이 복잡하신가 보군요. 어디 보자…… 장본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본인 입으로도 사과하려던 말이 쏙 들어간다고 반응하셨으니, 그 사안을 계속 붙잡아두고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정황상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야?'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을 내려보고 계신다고 보는 게 맞겠죠?"
"……"
정곡을 찔렸다. 그것도 꽤나 아프게. 근원계라는 곳에는 별의별 능력자가 다 있다고 하더니, 이 사람은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혹시라도 그게 맞다면 지금 굉장히 우스운 상황이다. 판옵티콘Panopticon 한복판인 줄도 모르고 스트립쇼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속내를 들여다보듯 말하는 현우에게서 문제의 붉은 아지랑이는 보이지 않았다는, 그러니까 그가 적대적인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 진짜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이 인간 대체 정체가 뭐지?
"어라라?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정도 맞나 보군요. 아, 혹시라도 독심술 같은 건가 의심된다면 안심하세요. 그런 건 아니니까. 어디 보자~ 식사를 해결하고 오라 하신 걸 보면 애초에 오래 앉아있을 생각은 아니셨던 거 같은데, 말씀하셨던 '확인하고 싶은 것'이 뭔지, 용건부터 들어보도록 할까요?"
머리가 잘 굴러간다고 자화자찬하더니 그럴 만한 자격은 있다는 건가. 흡사 소년탐정 만화의 주인공을 보는 기분이다. 이쯤 되면 그냥 백기를 드는 쪽이 편할 것 같다. 아등바등 매달려봐야 더 비참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휘영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면서 그의 말을 받는다.
"크흠! 흠! 그… 저기… 그때 이야기한 프로필 말인데요. 그게 확실히 놈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건지 어떻게 믿죠?"
목이 탄다. 심장 뛰는 속도가 다시 빨라지는 듯해 다시 차 한 모금을 마신다. 지홍을 통해 요청해 놓긴 했지만 그쪽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 그래서 이쪽을 떠보기로 했다. 만약 이쪽에서 주는 정보가 100% 확실하다면… 일단 취할 수 있는 이점은 취해야 할 테니까. 그 모습을 보던 현우는 싱긋 웃더니 옆에 있던 서류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낸다.
"…이게… 뭔데요?"
"방금 말씀하신 그건데요."
"…네?"
"그 프로필이요. 직접 보시는 게 확실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이라도?"
"……"
이건 예상 밖의 전개다. 황급히 파일을 낚아챈 뒤, 눈치를 살피며 열어본다. 하지만 현우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채 그냥 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건……"
파일에는 휘영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특히 돌연변이의 능력에 관한 부분은 애초에 지홍과 주고받았던 것과 전혀 다르게 적혀 있었다. 물론 이 파일의 내용이 진짜라는 전제가 먼저 필요하지만.
탁-
휘영은 일부러 소리 나게 파일을 덮으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서 솔깃한 눈치를 보이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없다. 현우의 입장은 모르겠지만,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많은 휘영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칼자루를 쥐고 있어야 하는 중요한 상황.
"뭐, 내용은… 디테일하게 잘 적혀있네요. 보고서 같은 거 굉장히 잘 쓰시는 타입이신가 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하하하, 그런가요? 그럼 제대로 보신 게 맞을 걸요. 제가 직접 쓴 건 아니니까요."
"호오… 밑에 부릴 만한 사람이 충분하신가 봐요?"
"글쎄요. 그 정도야 잘하는 동료가 있으면 부탁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질문에 담긴 의도를 눈치챈 걸까. 능청스럽게 빠져나간다. 휘영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걸 제가 어떻게 믿느냐 하는 거죠. 중요한 내용을 너무 순순히 보여주시면 정황상 일단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하아… 형사라는 건 참 피곤한 직업 같네요. 신중하게 접근하시는 태도는 칭찬해 드리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린 거니 더 이상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인데 첫판부터 장난질하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요?"
"……"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의심이 많으신 듯하군요. 원래 의심스러운 사람은 뭘 해도 못 미더운 법이죠. …… 뭐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특별 서비스 하는 셈 치고 좀 더 오픈해 볼까요? 근원계 쪽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이 부실한 상태이신 것 같으니."
한껏 올라가 있던 현우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와 희미한 미소로 바뀐다. 의뭉스럽게만 보였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 있던 몸을 당겨 앉으니 대화에 임하는 태도 자체가 확 다르게 다가온다.
"먼저 던지신 의문부터 답해보죠. 중요한 내용을 너무 순순히 보여주는 것 아니냐고 하셨죠? 결론을 바로 말씀드리자면… 그것만 가지고는 그놈, 못 잡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이 서류에는 놈이 누구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본체가 있을 만한 장소까지 모두 적혀 있는데요."
"아아, 대상이 아닌 방법의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류에 적혀있지 않죠.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고요."
"……?"
"병원에서 만났을 때 제가 했던 질문을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묻죠. 그날 놈과 마주쳤을 때, 경위님에게 뭔가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오랜만이다. 꽤 오래 찾아다녔다. 여기서 먹어치워 버린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두려움 속에서도 귓가에 맴돌던 몇 마디 말이 떠오른다. 그래, 그때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을 만한 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우가 말하는 행간에는 '놈이 했던 이야기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오랜만이라고, 꽤 오래 찾아다녔다고 했어요.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요. 그땐 경계심이 앞서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거니까."
"뭐, 이해합니다. 낯선 사람이 와서 예민한 부분을 묻는데 술술 말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죠. 아무튼 그 방법이라는 거, 그때 들으신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서류에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기도 하고요. 바꿔 말하면, 이제 결정을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결정이요?"
"머릿속이 복잡하셔서 그런지 자꾸 대화 흐름을 놓치시는군요. 제가 제안한 일을 받아들이실지, 결정하시라는 겁니다. 그걸 미뤄놓고 프로필을 먼저 요구하셨잖아요? 그깟 서류 몇 장 보여드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제 머릿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저로서도 보안이 필요한 사안이거든요."
솔직히 정말 깜빡하고 있었다. 기존에 알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상세한 자료를 접한 순간 생각만 너무 앞서 나간 탓이다. 그래, 결정을 해야겠지… 이제야 확신이 선다. 이 사람과 그 뒤에 있는 조직은 지홍 쪽과는 별개의 세력이 분명하다는 것. 같은 사안에 대한 정보에 이토록 차이가 있다는 건 자연스럽지 못하니까.
또한, 지홍이 병원에 찾아온 날 '누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냐'라고 물었던 것이 이들을 의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황상 거의 확실한 가설. 그렇다면 지홍과 현우, 그리고 그 배후의 세력은 서로 우호적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즉, 현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지홍과 척을 지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정보가 너무 절실해. 하루라도 빨리 놈을 찾아서… 매듭을 지어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휘영의 마음속에서 누군가 유혹하는 듯하다. 아직 뚜렷하게 알지도 못하는 근원계라는 곳. 그리고 그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 몇 번을 생각해도 휘영에게는 그들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했다. 고로 이에 관해서는 거리낄 게 없다.
다만 한 가지, '죽여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팀장인 영태와 다른 팀원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늘 가족처럼 챙겨주는 동료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적지 않은 폐를 끼치고 있음에도 모든 걸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사람들. 이들과의 관계는 다르다.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우기 위해 저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일단 수락하고 나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 전체적으로는 친절한 사람 같으니까, 죽이는 것 말고 방법이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면 알려줄지도 몰라.'
현우에게 전화를 걸기 전, 혼잣말로 중얼거렸던 의문을 다시 한번 품어본다. 물러설 곳은 이미 지나왔다는 느낌이 든다. 한 차례 폭풍이 휘몰아친 마음을 진정시키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인다.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이죠."
급작스러운 연재 중단 이후로 근 4개월 만에 돌아왔습니다. 일전에 맡았던 생계용 일거리에 변동이 생기고, 어느 정도 여유가 확보됐기에 예정했던 대로 다시 연재를 시작하려 합니다.
다만, 기존처럼 정기적으로 올리는 것은 어려울 듯해 한동안은 계속 비정기 연재를 유지하려 합니다. 먹고살 거리도 아직 충분치 않고, 개인적으로 기획 중인 다른 프로젝트도 있어서요. ^^; 여유가 있을 때는 다소 짧은 간격으로 연재할 수도 있겠고, 바빠질 때는 띄엄띄엄 연재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지난번처럼 장기적인 공백이 생길 듯할 때는 다시 공지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구독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전체 연재작은 매거진 : 어느 판타지 이야기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