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시커멓게 물든 방. 바닥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깔았고, 벽도 검은빛이 나는 목재로 채웠다. 저마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각종 가구나 소품들도 모두 검은색을 테마로 하고 있다. 그 흔한 포인트 요소 하나 없이 완벽한 까만색. 글자 그대로 '검은 방'이다.
서너 명 정도 앉을 수 있을 듯한 기다란 소파. 까만 시트 위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누워있다. 한쪽 팔을 눈가에 얹어 빛을 가리고 있는 걸로 보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셔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고, 벨트도 버클이 풀린 채 약간 돌아가 제자리를 벗어나 있다. 아마 누워있는 자세가 아니었다면 바지가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소파 옆에 나란히 놓인 긴 테이블 위에는 구겨진 자국이 뚜렷한 넥타이와 반쯤 빈 양주병이 놓여있다.
달칵-
커다란 문이 살짝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온다. 신현우다. 그는 소파 위에 길게 뻗은 사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맡에 섰다. 거의 대부분 술에 취해 있는 보스. 늘 보는 흔한 풍경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다.
"……자네인가. 그래, 무슨 일이지?"
"경과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경과보고…? 전화로 해도 될 일을, 뭐하러 귀찮게 여기까지 오고 그러나. 뭐, 이미 왔으니 무의미한 말인가. 그래, 어디 읊어봐."
소파 위의 사내는 일어나지도, 심지어 눈을 가린 팔을 떼 지도 않는다. 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목이 메는 듯 갈라지는 탁성이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에는 대놓고 귀찮아하는 느낌과 함께 알코올 기운이 얼큰하게 묻어 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양주병을 자리에 눕기 직전까지 비워댄 것이 분명하다.
"주시 대상 1호를 처리하기 위한 사전 준비가 끝났습니다. 필요한 사전 자료는 모두 전달했고, 은휘영 씨의 포섭도 완료했습니다. 구체적인 작전에 관해서도 설명해줬으니 이제 그쪽에서 움직이기만 기다리면 됩니다. 공공조직에 몸담고 있는지라 특별히 데드라인을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만… 제 느낌상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지. 그쪽 입장에서도 질질 끌어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 그래, 고생했네. 다른 쪽 준비도 이상 없나?"
"붙여놓은 감시자 쪽은 수시로 보고를 받는 중입니다. 가장 최근에 받은 보고에서 주시 대상을 계속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은휘영 씨 쪽에서 작전을 시작하면 발 맞춰 움직이도록 조치할 예정입니다. 만약 계획에 차질이 생겨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면… 더 미루지 않고 제가 직접 처리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이런 귀찮은 시도는 한 번이면 족하거든."
"제가 나서면 근원계 쪽에서 눈치챌 위험부담이 좀 있습니다만… 주군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또, 괜히 질질 끌다가 더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다소 리스크를 짊어지더라도 빠른 처리가 나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그래, 자넨 역시 내 의도를 잘 이해하는군. 그럼 보고는 끝난 건가? 끝났으면 나가봐. 술이 덜 깨서 그런지 자꾸 잠이 오는군."
사내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로, 다른 한 팔을 휘휘 저어 나가보라는 시늉을 한다. 어지간히 귀찮아하는 모습이다.
"저… 한 가지 추가로 보고 드리고 허락을 구할 사안이 있습니다만."
"하, 귀찮구먼…… 자넨 다 좋은데 항상 2%가 부족해. 그래, 뭔데?"
"이건 본래 계획에 없던 건인데, 이번 일이 끝나면 은휘영 씨를 저희 쪽으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음……?"
사내는 눈가에 얹었던 팔을 슬쩍 움직여 한쪽 눈만 뜬 채 현우를 올려다본다. 의외의 내용. 아주 약간, 흥미가 생긴 모양새다.
"포섭을 위해 두어 번쯤 만나본 결과, 주군께서 계획하신 큰 그림을 그려가는 데 있어 여러 모로 쓸모가 있을 거라는 판단입니다."
"……호오, 어떤 점에서?"
"일단 은휘영 씨는 근원계에 대한 기억 자체가 온전치 못합니다. 아마 각성이 진행되는 도중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상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경우니까요.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근원계 쪽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비밀 프로젝트의 대상자로서 그 부작용이 나타났을 가능성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두 번째는……"
"우리 쪽 실패작에서 파생된 존재일 수 있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파생됐다기보다는 실패작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고리가 있을 가능성입니다."
"음……"
천년만년 누워있을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사내가 드디어 몸을 일으킨다. 귀찮음과 졸음을 이겨낼 정도로 관심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한 뒤 옆쪽의 1인용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현우는 사내가 가리킨 자리에 앉아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일단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근거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주시 대상 1호가 은휘영 씨에게 집착 증세를 보인다는 보고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사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미미하게 주억거린다.
"좀 더 알아보니 그게 생각보다 꽤 오래전부터 보여왔던 패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저희 쪽에서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기에 단순히 불규칙한 행동 패턴이라고 규정했던 거죠. 최근 다시 포착되기까지 놈이 한동안 감시망에 포착되지 않았던 건… 집착 대상, 즉 은휘영 씨의 존재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영 자체가 깨어나기 전이었던 거죠. 최근 불완전하긴 하지만 그녀의 영이 깨어났고, 그에 따라 주시 대상 1호도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목표를 감지할 수 없으니 웅크리고 있었다…? 킁, 제법 영악한 놈이로군."
"그렇습니다. 최근 놈이 활동을 재개한 뒤에 저희 쪽에서도 패턴 수집을 계속했고, 모든 데이터를 한 곳에 모아보니 놈의 동선들이 만나는 교차점에 그녀, 즉 지금 말씀드린 포섭 대상이 있었다는 거죠."
사내의 표정이 심드렁해진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던 거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분이다. 현우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사내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이상하군. 깨어나기 전이라고 해도 존재감을 느낄 수는 있었을 텐데? 일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이 있지 않았나?"
"네, 원래대로라면 그렇습니다만… 은휘영 씨의 경우 각성 전까지는 완전히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잠재된 근원계인이 아닌, 완전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거죠. 영이 잠재돼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저도 더 빨리 찾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 이레귤러irregular 정도야 흔히 있는 일이니 더 문제 삼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깨어나기 전에도 있었다던 집착 패턴은 뭔가? 애초에 평범한 사람과 같았다면 전혀 감지할 수가 없어서 웅크리고 있던 건 설명이 되지만."
"그 부분을 막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주시 대상 1호가 몸을 숨긴 건 약 십수 년 전입니다. 이때까지 수집됐던 과거의 데이터를 모아 보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은휘영 씨의 부모 때부터 연관이 있었다는 거죠. 가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합니다."
"……흐음?"
사내는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슬쩍 미소를 짓는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들어 병째로 한 모금 들이킨다.
"오랜만에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어디, 계속해봐."
"십 수년 전에는 은휘영 씨의 영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놈이 다른 집착 대상을 찾아 움직였던 기록이 있더군요. 이 부분에서는 딱히 다음 단계로 나아갈 근거가 없어서 일단 아무거나 들쑤셔보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가장 개연성이 있는 혈연관계를 염두에 두고 검토해봤죠."
"……"
사내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귀만 바짝 세운다.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고 정리하느라 머릿속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주시 대상 1호는 은휘영 씨의 부모님과도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양친은 모두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사망했습니다. 부친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모친 역시 사건 이후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사건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장본인 내지는 최소 배후 인물이 주시 대상 1호였다면 모든 가설이 맞아떨어집니다. 이걸 토대로 정리해보면……"
"……영靈이로군. 부모와 자식 모두 근원계의 선택을 받은 케이스."
"역시 빠르시군요. 그렇습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 모두 근원계의 영이 들어가게 된 케이스죠. 처음에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영이 들어왔을 테지만, 각성 과정에서 아무래도 닮게 되는 부분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각성 전까지 쌓인 생의 기억들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요. 이렇게 되면 주시 대상 1호가 보였던 최초의 집착, 그리고 잠복, 이후의 활동 재개까지. 행동 패턴 전반에 걸친 설명 또한 가능해집니다."
"부모의 영을 쫓던 쓰레기 놈이 그와 비슷한 향기를 가진 영에게 집착한다는 건가. ……흥, 실패작 따위가 꼴에 일관성 있게도 설쳐대는군.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꼴이 아주…… 가관이야."
"이건 최악의 경우입니다만, 그냥 별 이유 없이 무작위 대상에게 집착 증세를 보이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낮습니다만, 그래도 0%는 아니기에 배제할 수는 없달까요. 아시다시피 주시 대상 1호는 가장 오랫동안 저희 감시망을 피해온 녀석입니다. 능력을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꽤나 걸렸죠. 원체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보니……"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등받이로 몸을 가져간다.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하자 흥미가 식은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뭐가 됐든 상관없어. 성가신 놈이긴 하지만 딱히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히 끝장내버리면 그걸로 충분해. 그건 그렇고… 그래, 대를 걸쳐 타깃으로 노려지는 가련한 여인에 대한 가설은 잘 들었네. 이제 그 불쌍한 아이를 우리 쪽으로 데려오면 무슨 득이 되는지, 그걸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불쌍한 아이'라는 표현에 현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잽싸게 고개를 숙여 웃음을 가린다. 아무리 신뢰하는 부하라 해도 자칫하다간 보스의 기분을 거스를지도 모르니 알아서 조심하는 것이다. 하긴, 눈 앞에 있는 이 존재에 비한다면 그 누구라도 '아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것이다. 존재해 온 시간의 양 자체가 어마무시하니까. 근원계의 수장이나 그 바로 아래 불천 정도라면 모를까.
"비밀 프로젝트의 부작용을 떠안은 실험체, 아니면 저희 쪽 실패작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존재. 내용에 조금 차이는 있겠지만 양쪽 모두 저희에겐 이득입니다. 일단 어느 쪽이든 무관하게 은휘영 씨의 기억 자체가 온전하게 깨어나지 않았기에,. 조작된 기억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이들과 달리 이후 전투원으로서 컨트롤하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가장 바탕이 돼야 할 근원계 관련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라면, 다른 기억이나 능력 또한 기존 체계를 벗어난 방향으로 개척할 수도 있습니다. 근원계에서 대응하기 힘든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될 수도 있겠죠."
"그건 일리가 있군. 하지만 저쪽에서도 담당자를 배치해 접촉한 걸로 알고 있는데. 자네보다 빨랐다면서? 그 정도 리스크는 이미 대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사내는 다시 긴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대꾸한다. 반쯤 누운 자세를 취하는 걸 보니 이야기에 다시 흥미를 잃은 듯하다. 현우는 보스 쪽으로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저쪽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기억을 조작해서라도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 하겠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제가 수시로 지켜보면서 진행하면 될 부분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간 은휘영 씨 주위에서 경계할 만한 움직임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흠…… 뭔가 문제가 생겼나 본데. 그렇지 않고서야 철저하게 계획된 대로 움직이는 그 놈들이 이런 돌발행동을 할 리가 없거든. 무슨 문제일까…… 알아볼 수 있다면 한 번 알아봐."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쨌든, 지금이 가장 유력한 기회입니다. 은휘영 씨의 현재 능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것뿐이지만, 잠재력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추가 능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기존 능력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도 있고요. 일단 능력 개발만 성공한다면 최소한 중상급 전력이 될 거라는 게 저희 쪽 연구진의 분석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영에 관해서는…… 혹시라도 저희 쪽 실패작과 연관된 케이스라면, 실패작들의 탈주 이후에 어떤 기억을 쌓았는지 그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저쪽의 프로젝트 부작용 케이스라면 비밀 프로젝트라며 거들먹거리는 놈들의 정보를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군. 그래…… 전부 듣고 보니 정말 기막힌 수로구만.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는 않겠어. 좋아. 처음 지시했던 대로 자네가 온전히 맡아 추진하게. 이후의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자고."
"네, 감사합니다."
사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다시 소파에 드러누워 한쪽 팔로 눈가를 가린다. 그 모습을 보며 현우는 방을 나섰다.
지홍은 요 며칠 집에만 틀어박혀 각종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돌연변이를 주제로 한 모든 연구기록 및 사건 일지. 그리고 현재까지 진행된 기억 누적 프로젝트 관련 보고서 중 열람이 허용된 것들. 며칠의 시간을 투자해 눈이 벌게질 정도로 들여다봤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일단 구체적인 키워드가 아닌, 해당 카테고리 전체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검토할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 별 의미 없는 자료조차도 일일이 들춰본 뒤 걸러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서류 열람은 실무자가 근원계로 넘어갈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없었기에, 원격으로 일일이 자료를 요청하고 열림 승인과 대출 및 전송 과정을 거친 뒤 하나씩 검토해야 했다. 거북이걸음이 따로 없는 지루한 과정이다.
"여기도 없고… 그래, 아직까지는 문제없군. 젠장, 이게 대체 무슨 뻘짓이야? 팔자에도 없는 상노가다라니."
문서 하나를 살펴보다가 책상을 탕- 내려치며 짜증을 낸다. 지홍이 찾고자 하는 자료는 너무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했다. 우선 현재까지 밝혀진 돌연변이들의 능력, 그리고 그들이 근원계의 감시망을 피해온 패턴을 모은다. 그리고 그중 '깨어나지 못한 영에 돌연변이가 숨어든 케이스'가 있었는지를 살핀다.
만약 여기서 해당 케이스가 발견되면 위험해진다. 휘영이 보이고 있는 이상증세를 '돌연변이가 숨어든 케이스'로 몰아갈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 중 자신이 찾는 내용이 없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못내 답답하다. 만약 모든 자료에서 그런 케이스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금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자들이란 언제나 '기존에 없던 것'의 발견 가능성을 열어두는 집단. 이대로 휘영의 불안정한 증세가 계속된다면, 새벽뫼 연구원들은 그녀를 기존에 없던 새로운 케이스로 올리고 경고 조치를 내리라는 요청을 올릴지도 모른다. 새벽뫼는 불천과 다이렉트로 연결돼 있는 조직. 어떠한 형태의 결정이든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전달된다는 뜻이다. 만약 불천에게까지 경고 요청이 올라가면 그 시점에서 게임오버, 더 이상 지홍의 선에서는 손을 쓸 수 있는 방도가 없어진다.
물론 휘영의 오류에 있어 지홍이 잘못한 것은 없다. 그는 그저 위에서 주어진 케이스를 맡았을 뿐이니 특별히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보고 시기를 놓쳤다는 명목으로 가벼운 근신 처분 정도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지홍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여태껏 맡았던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고, 계획했던 대로 모든 일을 진행시켜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정도의 화려한 이력에 첫 흠집이 될 수도 있는 이 상황 자체가 그에게는 크나큰 스트레스다.
"제길! 제길! 제길!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대체! 그렇다고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고……"
처음에는 스승 해강현이나 직속 팀장 백현에게 도움을 청해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스승인 해강현은 근원계의 질서와 법칙이 최초로 정비될 때부터 함께 해온 원로급 존재.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자신이 관여한 최초의 대전제에 어긋날 위험을 지닌 존재를 곱게 볼 거라 장담할 수는 없다.
혹여, 제자에 대한 정을 앞세워 도와주겠노라 한다 해도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이 워낙 중요하기에 여유가 없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타인의 시선을 피할 공간적으로도 그렇다. 무엇보다 그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존재, 불천과 절친한 사이. 별다른 격식 없이 수시로 만나는 사이에 자신의 문제를 완벽히 감추는 것도 고역일 것이다. 스승에게 그런 위험부담을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속 팀장인 백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확률로 따지자면 오히려 해강현보다 낮다. 자신에게 '휘영이 돌연변이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설명해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백현은 휘영에 관한 일련의 상황을 무척 냉정하게 바라보는 중이다. 즉, 문제가 생긴다면 여지없이 잘라내는 쪽을 선택할 거라는 이야기. 후배의 커리어에 흠집이 생긴다는 걸 백현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역시 더 큰 문제로 번지는 쪽을 더욱 경계하고 있다.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여도 정은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왔건만, 근원계 전체의 질서를 흔들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 ‘정’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알량한 감정일 뿐이다.
그나마 비밀스러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한 측근들이 죄다 이 모양. 그러니 이 하릴없는 노가다 작업을 도와줄 이를 찾는 건 애초에 사치다.
"아, 정말…… 이 골칫덩어리 경위님이 어느 날 갑자기 딱! 하고 완전한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되면 이딴 건 다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들인데. 이러고 있는 거 다 똥개 훈련이 돼 버려도 좋으니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야말로 해피엔딩이잖아! 으아아아! 제발 좀! 악, 내 발!"
발광하듯 발을 구르며 울분을 토해봐도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애꿎은 컴퓨터를 향해 발길질을 하던 지홍은 책상 모서리에 발등을 부딪친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제 풀에 지쳐 대 자로 뻗어버렸다.
"휴우, 이러고 있으면 뭐하냐. 서류 하나라도 더 봐야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지. 할 일도 오지게 많은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휴우…"
지홍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시 일어선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친 부분을 꾹꾹 주무르며 다시 다른 서류 파일을 열어 검토하기 시작한다.
요즘 다른 스토리물, 특히 웹툰을 많이 보고 있는데요. 스스로 이야기꾼을 칭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걸 종종 느낍니다. 소설과 웹툰의 문법은 다르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일단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우려가 자꾸 드네요. 세계관을 너무 방대하게 구상해 놓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개 과정은 다소 바뀌었지만, 초반에 생각해뒀던 결말은 이상 없이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애당초 이번 첫 번째 에피소드는 20부작 정도로 계획했었는데…… 당최 언제쯤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거죠. 떡밥 뿌려놓은 건 100%는 아닐지라도 최대한 회수해야 하니, 무작정 빠른 전개만 추구하기도 애매하고요.
뭐 아무튼…… 최대한 뚝심을 발휘해보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매거진 : 어느 판타지 이야기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