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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歌 #15. 이렇게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그녀와 나, 상상 속에서만큼은 <네버 엔딩 스토리>였으면…

by 이글로

"거기 신참들! 밥 먹고 좀 쉬었다 하자고. 수고들 했어."

"네, 고생하셨습니다!"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훔쳐내자 비지땀이 흥건하게 배어난다. 챙겨온 도시락을 꺼내 작업장 한 켠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건, 분명 별 시덥잖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가을이 한창이어야 할 시기인데 왜 이리 덥나… 하는 정도의, 정말 흔하고 시시콜콜한 생각.


그때,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왜 하필이면 딱 그때였을까. 열어젖힌 도시락 뚜껑을 손에 든 채, 머릿 속으로 한 다발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멈춰보려 해도 안 된다. 정지 버튼이 듣지 않는 미디어 플레이어처럼.


.

.

.


공항. 원치 않았던 헤어짐. 하지만 결국 다가왔던… 마지막.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건, 영화 또는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현실이더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공항에 가본 기억이라고는, 첫 회사 생활 동안 가봤던 짤막한 해외 출장 몇 번이 전부였으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따금씩 얼굴을 마주봤을 때,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 담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수하물을 부치고 탑승 수속을 밟는 내내 나는 그녀의 그림자만 밟으며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을 때, 비로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대로 가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한 가능성이 생생한 현실처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다. '눈부시다'는 말이 잘 어울렸던 그 미소를…… 내내 망설이던 손이 그제서야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뻗었던 내 손은, 그저 무안하게 허공만 휘젓고 말았다.


딱 한 번,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리저리 꺾여있는 가이드 라인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던 것 뿐일까? 잠깐이나마 고개를 들었던 용기는 어느새 다시 숨어버렸고, 나는 끝내 무언의 시선만으로 그녀를 보내고 말았다.


.

.

.


"형님!?"

"……어, 어?"

"도시락 뚜껑만 열어놓고 뭘 그렇게 멍을 때려요? 개미랑 파리들한테 밥 기부하시려고?"

"아, 별 거 아냐.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그나저나, 넌 오늘도 편의점 도시락이냐?"

"에헤이, 요즘 편의점 도시락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요. 혜X느님 도시락 몰라요? 이거 어지간한 수제 도시락 못지 않은데. 이 형님 이거, 아직 문명인이 덜 되셨네."

"……그래, 그 수제처럼 잘 나오는 혜X느님 도시락을 두고 내 반찬통에 젓가락을 뻗는 건 왜지? 합당한 이유를 대면 한 번 납득해보마."

"'못지 않다'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정성이 들어간 도시락만 하겠습니까."


넉살 좋게 키득거리며 녀석은 자연스럽게 옆에 주저앉았다.


"근데 형님, 아까 하늘 보면서 했다는 옛날 생각이 뭐예요?"

"그런 건 왜 묻냐, 임마."

"제가 맞춰볼까요? 음…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애틋한 이야기. 공항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노라.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 겁니까!"

"……"

"……헐, 설마 진짜 이거예요? 진심? 레알? 트루?"

"……"

"죄송해요, 형님. 드라마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스토리라서 그냥 되는대로 읊어본 건데."

"……됐어, 임마. 괜찮으니까 밥이나 먹어."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 속에 젓가락만 오간다. 녀석이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게 훤히 보인다. 제 딴에는 아닌 척 하려는 것 같지만 너무 뻔하게 티가 난다. 평소 장난끼 넘치는 활발한 녀석이 쭈그리고 있는 걸 보자니 영 신경이 쓰여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얌마. 괜찮다니까 무슨 눈치를 그렇게 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죽을 죄라도 지은 것마냥 그러고 있지 마라. 오래 된 일이야. 진짜 신경 안 써도 돼."


그제서야 다시 좀 밝아진다. 아까 전처럼 신이 나서 떠들지는 않지만, 목구멍까지 턱턱 죄여들던 삭막함은 사라졌다. 녀석의 젓가락이 다시 거리낌 없이 내 반찬통을 향한다.



식사가 끝나자 녀석은 어딘가로 뛰어가더니 이내 청량음료 두 캔을 들고 와 하나를 건넨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막 꺼냈는지, 시린 기운이 전해져 온다. 넉살 좋은 녀석의 사과 방식이려니 하고 피식 웃으며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셨다. 녀석도 씩 웃으며 다시 옆에 앉는다.


"근데요, 형님."

"음?"

"뭐랄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 헤어져야만 되는 사람들이 세상에 꽤나 많을까요?"

"……신경쓰지 말라고 했더니 대놓고 물어보기냐."

"헤헤헤, 어떤 기분이셨는지 궁금하긴 한데 돌려서 말하기가 어려워서요."


대책없이 솔직한 녀석이다. 어차피 조금 전 떠올랐던 기억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차였다. 이 녀석에게라도 감정을 털어놓으면 차라리 좀 편해지려나.


"글쎄. 내 경우에는… 그냥 그랬어.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처럼 막 미쳐버릴 것 같다거나, 체면 차릴 것 없이 주저앉아 발버둥친다거나 그렇지는 않았지. 보낼 당시에는 그냥 가나보다 하는 심정으로 보냈는데……


딱 그 다음날부터 한동안 엄청 안 좋더라고.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멍 하기도 하고, 아쉬움이나 슬픔, 뭐 그런 감정이 자꾸 생겨나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고 싶기도 하고. 밖에 나가도 같이 걸었던 길은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고, 심지어 그 길에 있던 거랑 비슷하게 생긴 의자 같은 것만 봐도 막 우울해지고. 그러고 보니 그땐 아까처럼 날아가는 비행기라도 본 날이면 완전 폐인처럼 지냈었구나."

"지금은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흠…… 아무 느낌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견딜만 한 정도? 뭐랄까. 아쉬움이나 슬픔 같은 감정의 종류는 그대로인데, 강도가 엄청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 슬프구나. 그래서 뭐?' 정도랄까."

"……뭔가 되게 감정이 메마른 사람 같아요."

"그러냐? 뭐, 그만큼 시간이 지나서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지금은 별 생각 안 들어. 이렇게 살다가 가끔씩 생각나면 '아, 그랬었지' 하면서 혼자 기억 더듬어보고 그러는 거지."


짤막하게나마 리액션을 하던 녀석이 갑자기 조용히 음료수만 홀짝거린다.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이리라. 슬쩍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다가 몇 마디를 보탠다.


"가끔 그런 생각은 해. 언젠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날이 있진 않을까? 만약 그러면 무슨 말을 할까? 그땐 내가 너무 가진 게 없어서 널 지킬 수 없었다고? 못난 나를 용서해달라고?"

"…아, 형님.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은데요. 그거야말로 진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녜요? 왜, 그럴 때 꼭 '세상 참 좁다' 하는 대사도 같이 나오잖아요. 근데, 세상 안 좁아요. 무지 넓던데요? 당장 서울에 사는 사람만 해도 천만 명인데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다는 게 말이 안 돼죠."

"큭큭큭, 그렇지. 세상 무지 넓지. 외국 한 번 나가보면 그게 더 실감나더라. 하긴… 그냥 그럭저럭 살다가 다른 사람 만나고, '아, 그땐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잊어가는 거. 그게 제일 현실적인 이야기지 않을까 싶다."

"그쵸. 드라마에서도 잘 안 다루는 거 보면 그게 진짜 흔한 현실인 거 같아요."


대화가 끝나간다는 걸 느꼈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듯도 싶다. 몽땅 다 털어내자 싶었지만, 끝까지 꺼내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수 년이 지난 지금도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지 않을까. 이 녀석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사실 난 아직도 종종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간절히 바란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정말 영화와 같은 일이 부디 현실이 되게 해달라고.


무던히도 눈치가 없고 둔한 나지만, 그 날 게이트 너머로 멀어질 때까지 그녀가 계속 머뭇거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힘든 일이 있을 때 먼저 물어봐주길 기다리는 그녀의 오랜 습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냈더라면, 책임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붙잡고 가지 말라 말이라도 했었다면, 그녀와 나는 지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하……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어차피 현실은 이런데."

"네?"

"음? 아냐, 아무 것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을 급하게 얼버무린다. 정말 찌질하고 못난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어서 도무지 말할 수가 없다, 이건.


"형님."

"응?"

"형님한테 그 이야기 여쭤본 거요. 사실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예요."


……뭔가 대차게 낚인 기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FEAg7-DpXY


손 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
오늘도 넌 숨쉬고 있지만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 위엔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너는 떠나며 마치 날 떠나가듯이
멀리 손을 흔들며
언젠간 추억에 남겨져 갈 거라고.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너는 떠나며 마치 날 떠나가듯이
멀리 손을 흔들며
언젠간 추억에 남겨져 갈 거라고.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여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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