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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歌 #14. 그게 왜 당신의 잘못인가요?

그래… 흔하게 있을 법한, <이미 슬픈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일 뿐.

by 이글로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시선을 떨군다. 얼굴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눈은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잔 한두 모금이 비워질 정도의 짧은 시간. 침묵을 깨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미안해요."

"……"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선배를 끝까지 믿어보는 거였는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10여 년 전과 다름없이 수수한 느낌. 한동안 눈에 선했던 그리움이 새삼 떠올라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그 시절의 그녀가 여전히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꽤 변했다. 아니, 참 많이 변했다. 우선 성격이 달라졌다. 툭하면 화 내고 내 뜻대로 안 되면 삐뚤어지던, 제멋대로의 성격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젠 입보다는 귀를 먼저 열 줄 안다고, 나름 자부한다.


경제적으로도 괜찮아졌다. 제법 값이 나간다 싶은 물건도 흔쾌히 살 수 있다. 정말 필요한 건지 꼼꼼히 따져봐야 하긴 하지만. 그토록 갖고자 했던 나름의 유명세도 얻었다. 인기 톱스타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만큼은 아니지만,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는 꽤 알아주는 정도.


10여 년 전, 그때는… 막연히 꿈으로만 꾸던 것들. 지금은 모두 가지고 있다. 뭔가를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도 배웠다. ……스스로를 너무 관대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없이 이어지는 내 시선에서 뭔가를 느꼈던 걸까. 그녀가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아요. 돈이랑은 전혀 관계없는…… 아니, 아니지, 조금은…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속물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감당해야 할 현실이 이런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뭐랄까…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는 의미로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

"휴우~ 순간의 선택이 삶을 좌우할 수도 있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네요. 그때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 사람 대신 선배를 따라갔더라면…… 다 내 잘못이에요.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할 말을 찾았다.


"그게 왜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

"너도 알다시피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사람이었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와 오기만 있었지. 그거, 보장된 것도 아니었잖아.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믿어달라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건 패기나 용기 같은 게 아냐. 무모한 거지. 너희 아버님이 하셨던 말씀, 이젠 다 이해해."

"……"


시무룩하게 일자를 그리던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위를 향한다. 한숨과 함께 자조 섞인 미소를 짓는다.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싫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이해하련다.


"내가 너를 선택한 게 잘못이 아닌 것처럼,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런가요.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선배는. 예전에는 참 성질도 급하고 까칠했었는데. 보기 좋아요, 지금이 훨씬. 부럽네요."

"……"

"내 인생인데, 더 적극적으로 내 뜻을 알렸어야 했는데…… 그땐 엄마, 아빠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거든요. 날 많이 원망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는 이런 마음, 말하지 못했으니까. 배신이라고 여겨도, 혹시 나를 미워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이에요. 이제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리고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는 잔 속의 음료를 빨대로 젓는다. 어색해할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다. 꽤 오래전 일인데 여전히 익숙하게 다가온다.


"내가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거겠지. 네가 모든 걸 포기하고 나를 선택해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할 정도의, 강한 믿음을 내가 줄 수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선배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요. 내가 선배를 끝까지 믿지 못한 것도, 선배가 내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도, 잘못한 건 아닐 테니까."

"……그래. 그럴게."

"먼저 일어나 봐야겠어요. 정말 반가웠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보다시피 내가 너무 여유가 없네요."

"어쩔 수 없지. 우연히 마주친 거니까. 이해해."


그녀가 일어선다. 어색하다. 어딜 가든 늘 함께 앉았고, 늘 함께 일어나던 시절이 다시 떠올라서. 빙그레, 그녀가 웃는다. 예전처럼 밝지는 않지만, '보기 좋아요'라는 칭찬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기분 좋은 미소.


"……또……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 거야. 분명히."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걸어간다. 멀어지는 뒷모습도 영 어색하다. 언제나 바래다주고 내 뒷모습만을 보여줬으니까. 그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대체 언제였더라. 두 번째로 만났던 날, 아직 연인이 되기 전이던 그 시절. 전철역 개찰구 너머로 사라지던 뒷모습이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가 가질 이 행복도 모두 그 사람에게 가게 해달라고, 그 사람의 선택에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던, 아니 놓기로 결심했던 그때, 나는 고작 바보 같은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나니 문득 우스워진다. 언제나 그랬듯, 신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마 겉으로는 그녀의 행복을 빌었지만, 속으로는 그게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 한 번 두고 보라고, 너 보란 듯이 성공해서 꼭 네 앞에서 웃어 보이겠노라고 악에 받친 다짐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맞은편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머그잔 속, 그녀가 남긴 커피가 보인다. 억지로 밀어내고자 했던 미련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래, 누구나 겪을 법한 지난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끝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밀어내야만 했던, 이미 슬퍼져 버린 사랑 이야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세상에 태어나 그런 세상에 살았다는 것 정도이려나. 현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뭔가를 걸지 못하는. 그리고 그것이 '그럴 수도 있다'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


"그래도 잘못이 있다면…… 내 잘못이겠지.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고, 그래서 차마 널 잡지 못했으니까. ……늦었지만, 미안해."


10여 년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끝까지 그녀에게 직접 전하지는 못한 말. 그녀가 먼저 일어난 빈자리에, 그 말을 독백으로 새겨놓은 뒤 거리로 나선다.




https://www.youtube.com/watch?v=wgj_w9a1ODU


널 볼 수 있어 행복했었지
그대가 날 위해 있어준 시간만큼
너의 부모님께 전해 들었지
나 아닌 사람과 결혼하게 된 걸

너 그렇게 힘든데
내게 말 못 하고 울고 있던 게 생각 나

떠나는 그대여 울지 말아요 슬퍼 말아요
내가 단념할게요
마음 편히 가시도록

내 사랑 그대가 날 떠나 행복할 수 있다면
내가 떠나갈게요
나의 그대 삶에 축복을……


너무 걱정 마 철없던 내가
너 없인 무엇도 할 수는 없지만

넌 널 위해 살아줘
나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떠나는 그대여 울지 말아요 슬퍼 말아요
내가 단념할게요
마음 편히 가시도록

내 사랑 그대가 날 떠나 행복할 수 있다면
내가 떠나갈게요
그대 만나 느낀 기억도

내가 가질 행복도 모두 가져가세요
나의 그대 삶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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