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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29.

by 이글로

“무슨 화장실을 그리 오래 쓰십니까? 일 처리할 시간도 빠듯한데 아주 여유가 넘치십니다?”

뭉그적거리며 걸어 나오는 백현을 향해 지홍은 인상을 쓴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잠시 움찔한 백현은 이내 여유로운 표정을 꺼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명색이 직속 상사인데 살살 좀 다뤄주면 안 되겠냐. 가뜩이나 제약 많은 몸뚱이 적응하느라 힘들어 죽겠구만.”

“엄살이 많이 느셨네요. 처음 와보시는 것도 아니시면서.”

“야, 인마. 마지막으로 온 게 벌써 몇십 년 전인데 그럴 수도 있지. 하여간에 짜식이 인정머리가 없어요, 인정머리가. 과도하게 깐깐해가지고는.”

“그런 건 꼼꼼하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튼… 다른 꿍꿍이 챙기느라 늦게 나오신 건 아니고요?”

“꿍꿍이는 무슨. 네놈 상대로 머리 써봐야 금방 들통날 게 뻔한데 뭐 하러 에너지를 낭비하겠냐.”

“흐음……”


의심스럽다는 듯 아래위를 훑어보는 지홍의 눈초리. 뜨끔한 내색을 감추려 딴청을 피우는 낌새가 느껴졌지만, 더 몰아붙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딱히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백현과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불안한 동맹관계를 언제까지 유지하는 게 좋을지를 가늠하고 있자니, 백현이 자연스레 화제를 바꾼다.


“그건 그렇고, 아까 보니 생각에 아주 푹 빠져있던데… 의외로 빨리 끝났다?”

“…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는 정했고?”

“확실한 건 아닌데…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 예~전에 저한테 긴급으로 은 경위님 케이스 맡기셨을 때… 제가 프로필 알아봐 달라고 했던 놈 기억하시죠?”

“음… 아하, 그 뭐냐. 번화가 한복판에서 자폭해서 여기저기 시끄럽게 만들었던 그놈 말인가? 은휘영 씨 각성에 단초가 됐던?”

“네. 정확히는 그놈의 영체를 조종했던 진짜 흑막이죠.”

“그래, 그랬지. 호오~ 그러고 보니 이번 케이스가 그때부터 시작됐지. 거 참, 감회가 새롭구만. 근데 이제 와서 그놈은 왜?”

“은 경위님은 그때부터 끈질기게 그놈을 쫓고 있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통화를 했을 때도 이번에는 그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었고요.”

“흐음, 그래서?”

“감 오지 않으세요? 그때 그놈 프로필을 직접 조사하신 분, 여기 계시는데.”


손짓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지홍을 보며 백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곧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아아… 옳거니! 그러니까 그때 그놈과 똑같은 흔적을 찾아보면 된다 이거군?”

“그 흔적, 기억하고 계시겠…죠? 어째 불안한데.”

“뭐, 당장 떠올릴 수는 없지만 비활성화 구간에 놔뒀을 뿐이니까 끄집어내면 돼.”

“다행이네요. 근원계 쪽에 남겨두고 오신 게 아니라서.”

“언제 어떻게 쓰일 줄 몰라서 그냥 들고 다니지. 아직 마감된 일이 아닌데 기록저장소에 놔두면 필요할 때 절차 밟느라 못 써먹거든. 근데, 그 흔적만 찾아서 따라가면 은휘영 씨가 있는 데까지 갈 수 있는 거냐?”

“글쎄요. 도중에 끊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최소한 방향은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운 좋으면 결정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어느 쪽이든 현재로서 최선의 대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쩝, 그렇긴 하네. 그럼 일단 조용한 곳 좀 찾아봐라. 기억 활성화 구간을 바꾸려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거든.”

“저도 이 주변 지리는 잘 모르니 은 경위님 집으로 다시 가시죠. 그나마 익숙한 곳이니까요. 아, 혹시 모르니 경계는 무료로 서 드리겠습니다.”

“…그럼 돈 받으려 그랬냐? 와 나, 이 무서운 새끼.”

“뭘 새삼스럽게.”

“원래 알고는 있었는데 알면 알수록 더 무섭다.”

“더 아셨으면 다행이고요. 기대하십쇼. 앞으로도 꾸준히 더 발전할 예정이니까.”

“독한 새끼…”






휘영의 집. 백현은 마당 한편의 그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꽤나 힘이 드는 작업인 듯하다. 그 곁에 선 지홍은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도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백현은 손등으로 이마를 쓱 훔치며 호흡을 크게 뱉어냈다.


“휴우, 지친다 지쳐.”

“끝났습니까?”

“오냐. 오랜만에 집중을 좀 했더니 엄청 힘드네. 뭐 시원한 마실 것 좀 없냐?”

“사람 사는 집이니 냉장고에 물이라도 있긴 하겠지만… 남의 집 뒤지는 건 실례죠.”

“실례인 줄 알면 미리 좀 사들고 오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그리고, 애초에 주인 없는 집에서 이러고 있는 것부터가 이미 심각한 실례 같다는 생각이 드는걸.”

“……”


대답이 없는 지홍. 맞는 말이라 뭐라 대꾸할 수가 없는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보며 백현은 오랜만에 한 방 먹였다 싶어 쿡쿡 웃었다.


“그나저나 필요할 것 같은 내용만 따로 정리해 봤는데, 어떡할래? 손으로 적어주랴? 아니면 영체 쪽으로 전송해 주랴?”

“그냥 손으로 써주십시오. 영체 능력을 한동안 안 썼더니 요새 좀 이질감이 들어서… 메모로 보는 게 더 편합니다.”

“엥? 그 정도면 일부러라도 쓰는 게 좋지 않겠냐. 나중에 근원계 돌아올 때 어떻게 적응하려고.”

“어떻게든 되겠죠, 뭐. 무엇보다도… 당분간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번 케이스가 어떻게 정리되든 임무 성공은 아닐 것 같으니까.”

“아… 하긴…”


지홍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백현은 그 표정에서 심란함을 읽었다. 어떻게든 휘영을 구제할 방법을 찾고자 하지만, 어찌 됐든 그 끝은 실패에 가깝다. 본인의 실책 때문은 아니지만, 고과 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책임과는 별개로, 지홍 입장에서 처음 경험해 보는 실패. 아마 그 스트레스는 한결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 저야 어느 정도 각오했다고 치고, 형님은요? 강등 걱정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글쎄. 적당한 선에서 매듭을 지을 수만 있으면 며칠 억류되는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운 좋으면 근신 처분으로 끝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네 말대로 강등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근원계 잔류는 하게 될 거다. 설마 다시 이 동네로 와서 인도자부터 시작하라고 하시지는 않겠지. 징계 규정도 정해져 있고, 무엇보다도 인도자부터 팀장 사이에 등급 차이가 몇 갠데 인마.”


백현은 ‘새삼 이 몸과 네놈 따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겠냐.’라는 식의 농담이라든가, ‘그런 의미에서 네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주면 참 좋겠다만.’이라는 식의 진지한 멘트를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지홍의 표정이 한층 심각하게 굳어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다. 어색해지려는 기류를 쫓아내기 위해 백현은 지홍의 휴대폰을 낚아채 방금 기억에서 끄집어내 정리했던 정보를 입력해 주었다.


“자, 이제부터는 네 차례다. 흔적을 감지하고 찾아내는 쪽은 네가 나보다 월등하니까.”

“그럼, 잠시 분석 좀 하겠습니다.”


지홍은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름대로의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흔적… 아까 경찰서에서 봤던 수배 전단 속 얼굴과 비슷한 향이 느껴진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이 정도면 최소한 파생체, 심하면 돌연변이 본체에서 또 한 번의 변이가 이루어진 제2의 본체일지도? 이거… 어느 쪽이든 만만치 않은 문제가 될 것 같은데.’


비활성화 상태로 돼 있던 기억 구간을 끄집어내자 흐릿했던 그림이 뚜렷해졌다. 약 80%가량 채워진 커다란 퍼즐.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흔적은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 그가 인도자로 일하던 시절 마주했던 의문의 존재와 무척 닮아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놈을 쫓고 있는 은휘영 씨는 뭐지? 가족을 잃은 복수심 때문이라고 하면 그럭저럭 동기는 되겠지만… 뭔가 석연치 않단 말이야. 집안에 퍼져있는 이 낯설지 않은 흔적도 마음에 걸리고. 무엇보다 하필 지금 이 시점에, 하필 이 놈을 쫓고 있다? 너무 교묘하게 들어맞아서 더 찜찜해. ……이 자식은 분명 뭔가 더 알고 있을 텐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지홍을 슬쩍 쳐다본다. 휘영의 담당 인도자인 그의 기억 속 세부내용을 겹쳐보면 좀 더 많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20%를 채워줄 정보가 있다면 이 승부는 결정된다. 지금 그의 퍼즐은 어느 정도나 채워져 있을까? 자문자답을 반복하고 있을 즈음, 생각 정리를 마친 지홍이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비해 한결 홀가분해진 눈빛이다.


“다 됐습니다. 이제 움직이시죠.”

“움직여? 어디로?”

“영업비밀입니다. 그냥 따라오세요.”

“… 뭐야, 그게?”

“잊으셨나 본데, 형님이랑 저는 지금 한.시.적. 동맹 중입니다. 지금까지는 어쨌거나 단서를 찾아야 하니 굳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 방향이 엇갈릴지 모르잖습니까?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히 다르니… 피차 모든 패를 공개할 수는 없죠.”

“젠장, 이 자식 태세변환 빠른 거 보소. 소름 끼친다, 진짜. 맞는 말이라 반박도 못하겠고.”


시시콜콜 농담 주고받던 게 언제냐는듯, 냉정해진 말투. 백현은 조금 전까지 속으로 굴리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을 송두리째 들킨 게 아닌가 싶어 뜨끔했다. 현재 백현이 찾고자 하는 단서는 지홍의 기억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지홍이 어디로 가든 계속 따라가며 밑천까지 닥닥 긁어내는 게 백현으로서는 최선인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도, ‘한시적 동맹관계’임을 대놓고 강조해 버린 마당에 지홍이 자기 밑천을 쉬이 드러낼 리 만무하다.


‘이건 뭐, 타이밍도 아슬아슬한 데다가 타협의 여지도 없구만. 별 수 없지. 일단 공통 동선부터 확보해 두고 봐야겠는데.’


결정은 빠르게, 바로 입 밖으로 꺼낸다. 이미 경계심을 드러낸 상대 앞에서 복잡한 생각으로 시간을 끄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길게 생각해 봐야 지홍의 머리회전 속도를 넘어선 방안을 찾아낼 수도 없을 테고.


“그래도 어떤 식으로 풀어갈 건지 개요 정도는 설명해 줘야지. 주인 따르는 강아지마냥 네 뒤만 쭐래쭐래 따라갈 수는 없지 않겠냐.”

“제 기억에다가 방금 주신 내용들을 더한 결과를 토대로 최근 동선을 따라가 볼 겁니다. 제 기억에 당시 사건 이후로 최소한 한 곳 이상 겹치는 동선이 있거든요. 거기까지는 같이 가도록 하죠. 그다음에는 각자의 동선이 나올 텐데, 그때부터는… 각자 목표에 맞게 행동하면 될 것 같네요.”

“이야… 단호하구만. 단호박인 줄?”

“… 시답잖은 농담할 상황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뭘 새삼스럽게.”





백현과 지홍은 한 골목길 어귀에 도착해 있었다. 이리저리 얽힌 골목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동네다.


“여기냐?”

“약간의 시간 차가 있긴 한데, 두 흔적 모두 이쪽으로 이어졌군요. 정황상 은 경위님이 돌연변이 놈의 뒤를 쫓아간 걸로 보입니다.”

“시뻘건 색깔 흔적 옆에 희미하게 따라가는 뭔가가 보이긴 하네. 푸르스름하게.”

“네, 그 푸르스름한 게 은 경위님의 영체 흔적입니다.”

“난 잘 모르겠다만… 네가 그렇다면 믿어야지.”

“최소한의 페어플레이는 합니다.”

“오냐~”


두 흔적이 겹쳐진 동선을 보자, 지홍은 얼마 전 휘영이 병원에 입원했던 일을 떠올렸다. 남아있는 흔적의 정도로 미루어볼 때, 그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홍은 굳이 그 내용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모름지기 말을 아낄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를 줄일 수 있는 법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적과의 동행’ 상황에서는.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자신이 읽은 흔적을 따라가는 백현이 앞서 걷고, 겹치는 동선을 따라가는 지홍이 약간 뒤처져 따랐다. 앞서가던 백현이 멈춰서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왜 그러시죠?”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재적 경쟁자한테.”

“… 어설픈 견제는 그만두시죠. 어차피 거기까지 올라가면 저한테도 보일 거잖아요?”

“아… 그렇구나, 참. ……이 자식 이거, 여기서 잠깐 흔적이 끊어졌다.”

“끊어져요?”


백현의 말대로, 계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두 개의 동선 중 하나가 끊어져 있었다. 휘영의 동선은 쭉 이어져있었고, 핏빛의 동선은 잠시 끊어졌다가 휘영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흔적들의 농도를 면밀히 살핀 지홍은 새로운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 여기까지는 쫓겨왔던 놈이 도리어 은 경위님의 뒤를 따라갔어. 어딘가 숨어 있었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다른 곳에 옮겨 가 있었거나?’


어느덧 백현과 지홍은 계단길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올라왔다. 핏빛과 푸른빛이 짙게, 그리고 어지럽게 섞여있는 곳.


“여기 흔적이 꽤 크다? 푸르스름한 흔적도 꽤 많고.”

“싸웠거나 했나 보죠. 아니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했거나.”

“그런데… 돌아내려간 흔적이… 없다? 나만 안 보이는 건가?”

“아뇨. 없는 게 맞습니다. 두 흔적 모두 여기서 사라졌어요. 마치 증발한 것처럼.”

“한 놈은 본체 밖에서 자유자재로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했으니 이해가 되는데… 은휘영 씨는 어떻게 된 거냐?”

“기절한 거죠. 의식이 없을 때는 한시적으로 영체 신호가 끊어지게 되니까요.”

“아……”

“아무튼… 형님, 아니 백현 팀장님과의 동행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을 말하는 지홍. 그 사무적인 말투에서 백현은 기묘했던 여행이 끝났음을 알았다. 아울러, 지홍의 퍼즐이 자신보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본다. 여기서 접고 같은 길을 갈 생각은 없냐?”

“그러기엔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가깝게 왔더라도 애당초 돌아갈 생각은 없었고요.”

“그래…… 아쉽지만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백현은 손바닥에 은빛의 기운을 일으켰다. 그 뜻을 알아챈 지홍 역시 같은 행동을 취한다.


“근원계 대순환 관리부 강림팀 나지홍. 강림팀장 권한으로 현 시간 부로 팀에서 제명한다. 이후의 모든 행동은 단독으로 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책임도 모두 본인에게 귀속된다. 동의하나?”

“… 동의합니다.”

“제명 절차 완료. ……그동안 고생 많았다.”

“팀장님… 아니, 형님도요.”

“먼저 가라. 난 여기서 바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잠깐이었지만 참 피곤했던 몸뚱이라서.”


고개를 끄덕인 뒤 지홍은 발길을 돌렸다. 머뭇거리며 몇 걸음 걷던 그는 멈춰 서서 백현을 보며 한 마디를 더했다.


“… 다행입니다. 형님과… 싸울 일이 없어서. 솔직히 지금 상태에서는 저한테 승산이 있었을 텐데 말이죠.”


백현은 대답 대신 피식 웃는다. 다시 몸을 돌린 지홍은 조금 전과 달리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현의 눈초리가 꽤나 쓸쓸해 보인다.


“눈치 빠른 새끼, 역시 알고 있었구만. ……안 싸우기는… 지금부터는 몸으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워야 할 텐데. 그나저나 정보가 부족해서 영 아쉽지만… 별 수 없구만. 이제 여기서 내 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러고 보니 일 끝나면 술 한 잔 얻어마시기로 했는데. 비싼 술맛도 못 보고 가는구만.”


백현은 곧장 불천의 직통라인으로 호출을 넣었다.


“접니다, 염훈 수석.”

[연락이 잦다는 건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면 되나요?]

“희망사항이지요.”

[흠, 그렇군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중요한 일이라 말씀하고 가신 터라 당장 연락을 넣기는 어렵군요. 곧 돌아오실 것 같긴 합니다만… 회신 요청을 올려놓을까요?]

“복귀하려고 합니다. 곧 제가 직접 보고 올리러 간다고만 남겨주십시오.”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백현은 으슥한 골목길을 찾아 들어갔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손에 칠흑색 기운을 일으켰다. 검게 물든 손으로 허공을 가르자 작은 아지랑이가 일렁인 뒤 자그마한 공간이 열렸다. 백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것과 같은 형태와 크기.


“불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시간이 좀 있다고 했으니 자료나 찾아보면서 내용을 정리해 두면 되겠군. 그럼 안녕이다, 위태로운 몸뚱이.”


마지막 혼잣말과 함께 허공의 공간이 몸집을 키워 백현의 몸을 통째로 삼켰다. 그가 서있던 자리는 아주 잠시, 잔상이 남는 듯하더니 다시 원래의 으슥한 골목으로 돌아갔다.




간만에 연재 초창기와 비슷한 속도를 냈습니다!

늘 오늘처럼만 의욕이 넘쳐주면 완결도 금방일 것 같은데 말이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전체 연재작은 매거진 : 자칭 B급 판타지 소설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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